빨간 숫자의 해

나도 이제 좀 누려보자!

by 지오바니

휴직 후 빨간 날과 파란 날의 경계가 모호한 날들이 벌써 여럿 지나가고 있다.

일을 할 때는 달력에서 빨간 숫자를 발견하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해가 바뀌면 빨간 날을 전부 세어서 올해는 총며칠을 쉴 수 있나 하는 실없는 짓도 하며 정신승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1년이 통째로 빨간 숫자가 되니 감흥이 그리 크지 않다.


항상 파란 날에만 문을 여는 공공기관과 은행 등을 방문할 일이 생기면 그렇게 부담이 되고 반차를 내야 하나 아니면 잠시 회사에 양해를 구해야 하나 마음 불편한 시간을 보내며 미루기 일쑤였다. 점심시간, 간신히 짬을 내 들른 은행에서 대기자가 많아 오래 기다리는 경우가 생기면 좌불안석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 보느라 제대로 일을 못 보는 경우도 다반사. 하지만 오늘 난 내 앞 대기자가 30명이 넘는 은행 순번표를 받고도 아무 망설임 없이 자를 찾아 앉았다. 폰뱅킹이나 모바일로 뱅킹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은행 지점들도 많이 줄어들어 오히려 이렇게 은행을 직접 찾아야 하는 경우엔 항상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난 빨간 해를 사는 사람. 글도 쓰고 전공 관련 논문도 읽으며 내게 강제로 주어진 잉여의 시간을 여유로움으로 승화시킨다.


평소 같았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을 상황을 즐기고 있자니 조금 더 여유를 부리고 싶어 진다. 1시간을 넘게 기다려 드디어 대면한 은행원에게 좋은 투자 상품을 추천해 달라며 너스레도 떨어 보고 집에 오는 길엔 이웃 동네로 멀리 돌아가는 버스도 괘념치 않고 올라탔다.


시간이 금보다 귀하다는 걸 매일 실천하며 살던 나인데... 이런 내가 좀 낯설지만 아주 나쁜 느낌은 아니다. 간을 허투루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에 지나지 않았을 시간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밀도 있게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조급병과 급한 성격은 환경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발을 동동거리며 한 시간이 넘게 걸려 출근을 하고 회사에서는 해내야 하는 업무들에 매여 동동거리고 집에 와선 하루 종일 비운 엄마의 자리를 어떻게든 채워보려 동동거리며 그렇게 하루를 살았으니 느긋함은 내게 사치였는지도.


물론 아직까지 완벽히 그 조급증을 버리진 못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오늘 하루 일과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혹시 빈 곳이 있나 그럼 뭘로 채울까 고민하고 있으니. 허나 벌써 세 번째 장이 넘겨진 달력을 보며 곧 더 익숙해지리라 기대한다.


이렇게 올해 내 달력은 빨갛게 물들었으니 그 여유로움의 사치를 좀 누려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