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만에 다시 나간 요가 클래스에선 나이 지긋하신 회원분들이 엄청 반가워하며 인사를 한다. 처음이라 혼자 어색해서 안 나온 줄 알았다며 말을 많이 시켜줘야겠다고 다들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네신다. 그 마음이 감사하면서도 모두에게 주목받는 것이 영 불편하다.
2주를 쉬었으니 원래도 뻣뻣하던 내 몸은 그 새 더 굳었다. 선생님은 한 두 달이면 좋아질 거라고 하시지만 수십 년을 굳어 있던 몸이 쉽게 유연해질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회원분들은 잘 되는 자세가 나만 안되고 있다고 굳이 콕 집어서 얘기만 안 하시면 너무 좋겠다. 중간중간 다들 나의 포즈를 힐끔거리시는 것이 너무 창피하다.
평생 주목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나의 성격은 아랑곳없이 한국의 평균 남성 키보다 큰 내 키는 어딜 가든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평생 단화를 신고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다. 얼굴이 동그란 탓에 앉아 있으면 딱히 키가 커 보이지 않아 차 안에 앉아 있다 일어서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일은 다반사였다. 높은 굽을 신었나 신발 굽을 확인 하면서... 그런 주목이 싫어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소박한 차림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요즘 어린 친구들 중엔 나 정도 큰 사람도 많지만 내가 어릴 땐 난 많이 큰 편이었다.
이런 내가 다시 어깨를 피게 된 건 꼼군 덕이 크다. 날 처음 보곤 '와 저렇게 키 큰 여자는 처음이야'라고 생각했다던 그는 항상 단화만 신던 내게 멋지게 힐을 신으라며 자신보다 키가 커져도 상관없다고 쿨 하게 날 독려했다.
그때부터 1, 2, 3센티미터씩 천천히 굽이 있는 신발에 적응하며 회사에선 가끔씩 5센티미터 굽의 신발도 신고 다녔다. 그것만 신어도 180이 넘어가는 키가 되어버려 어디서든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만큼 솟아올랐지만 이제 더 이상은 움츠리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높은 굽을 신고 자신 있게 밖을 활보할 수 있게 되면서 덩달아 자존감도 올라갔다. 이젠 어딜 가도 누굴 만나도 움츠려들지 않는다. 학창 시절 버스에서 벨을 누르는 것이 부끄러워 제때 버스에서 내리지도 못 할 만큼 소심했던 나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이런 자신감은 그의 쿨한 독려와 더불어 누군가의 보호 속에 있다는 안정감에서 나왔다. 아이를 임신했던 때였다. 배가 꽤 불러온 나는 꼼군과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붐비는 주말의 대형마트엔 여기저기 큰 카트들끼리 더러 부딪히기 일쑤였고 급기야 어떤 아주머니는 그 카트로 내 배를 들이받았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너무 아파 "아야!"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아무 말 못 하고 선 나를 본 꼼군은 큰 소리로 아주머니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제야 부른 내 배를 발견한 아주머니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나는 미안하다는 아주머니를 두고 흥분한 꼼군의 팔을 붙들고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좀 놀랐던 것 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때 기억이 이렇게 생생한 건 내게 부모 말고 보호자가 생겼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말도 없고 점잖은 꼼군은 내 편이 되어야 할 땐 그렇게 확실히 내 편이 되어준다. 내게 절대적인 내 편이 생겼다는 안도감과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은 높아진 자신감의 커다란 원천이 되었고 이는 내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그렇게 회사에서도 더 당당하게 남 앞에 나설 수 있게 되었고 이제 난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으로 통한다.
휴직도 꼼군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꿨을 것이 분명하다. 휴직을 하네 마네... 어찌 보면 배부른 자의 투정일 수도 있던 고민을 그가 있어서 해볼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고마운 것 투성이다.
나도 그에게 이런 안정감을 주었을까. 가끔씩 힘들어하는 그에게 "회사 힘들면 때려치워! 내가 먹여 살릴 테니"라고 허세를 잔뜩 부리면 그냥 피식 웃고 말던 꼼군...
오늘은 저녁 반찬으로 꼼군이 좋아하는 고기를 좀 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