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구두를 꺼내신고 길을 나섰다. 작년 겨울에 회사 근처에서 사놓았던 주황빛 구두. 내가 과연 이런 색 구두를 신고 밖에 나갈 일이 있을까 하면서도 그냥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색이었다. 언제 신을 수 있을까 했는데 햇빛이 찬란한 오늘, 오랜만의 강남 나들이에 그 구두가 딱 안성맞춤이다.
따스한 봄날 예쁜 구두를 신고 강남거리를 걷는 기분이 제법 산뜻하다. 시골 동네에서 매일 운동화에 레깅스를 입고 질끈 묶은 머리로 돌아다녔는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신경 써서 골라 입은 옷차림으로 강남 한복판 카페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자니 꼭 휴가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예쁜 상점과 높은 빌딩이 가득한 이 곳을 이젠 종종걸음으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여유 있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다. 내 일터였던 동네가 휴가지처럼 느껴지는 걸 보니 이제 휴직자 다~ 됐다.
바쁘게 사는 친구들을 만나 휴직 소식을 건네면 모두들 표정관리가 안된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을지도 모를 장기간의 휴직인데 휴직이 복직을 담보로 하지 않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요즘엔 다들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다.
나도 굳이 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며 이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다. 그저 오랜만에 바깥세상에 나왔으니 다른 이들의 사정이 궁금할 뿐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소식과 미처 생각지 못 했던 유익한 정보들을 얻기엔 이렇게 나와 전혀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최근에 벤처회사를 차려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된 한 친구는 회사를 키워가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아이들 교육 앱을 개발한 지 벌써 7년 째라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이 나이쯤 되니 다들 자기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다들 성공했다 얘기 듣는 친구들은 전부 자기 사업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월급 받으며 성공했다 얘기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고액의 연봉을 받는 대기업의 중간 관리자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기에 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업의 세계를 잠깐 흘낏거렸던 적이 있다. 내가 하는 일 들 중 사업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얼까 진지하게 고민도 해봤다. 그러다 내가 내린 결론은 어이없게도 '나는 휴일엔 쉬고 싶다'였다. 남들 일 할 때 일하고 남들 쉴 때 쉬는 것이 맘 편한 일이라는 걸 일찍이 간파한 때문일까. 사업을 하면 내 일 이기에 더 재미가 있을 진 모르겠으나 성격상 24시간 일에 매여 있을게 뻔하다. 큰 부자 될 욕심도 없으니 그저 조금이라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내 가족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만큼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곤 곧 사업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다만 더 나이가 들어 월급 받는 직장을 다니지 못할 때가 오면 그땐 소일거리를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갖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 제빵을 배우고 싶어 하는 꼼군에게 베이커리를 맡기고 내가 좋아하는 허브차와 정성껏 내린 디카페인 커피를 팔고 그간 모아놓은 책으로 벽을 한 가득 채운 곳. 그곳에서 저녁이 되면 우리 부부가 왕년의 실력을 뽐내며 악기를 연주하며 그간 생활에 치여 그저 꿈으로만 남았던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노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곳에서 수익을 꼭 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삶이 아니길, 그래서 진정으로 그 공간을 좋아하며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커피숍을 나와 휘황찬란한 거리와 빌딩 숲에 둘러싸여 그 예쁜 구두를 신고 걷자니 그 소망은 아직은 먼 나라 얘기처럼 느껴진다. 이 속도로 걷다 보면 언제 그 꿈에 닿을 수 있을지 요원하다. 그러는 동안 다른 이들은 내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 저만치 앞서 간다.
하지만 다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대로 사는 것. 이 믿음이 큰 성공을 이룬 주변인들의 얘기에도 내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남들이 한다고 따라가지 않고, 이 소중한 꿈을 향해 난 오늘도 내 속도에 맞춰 눈 앞에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