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핏 고인물들이 내뿜는 갓생의 기운으로 넘쳐나는 아침 운동을 다녀왔다
'갓생'이라는 신조어가 mz세대에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자신만의 '리추얼'로 '루틴'을 시작하는 '미라클 모닝'이나 방과 후, 퇴근 후에 저녁 운동을 다니며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을 SNS에 인증하거나 만 보를 걸으면 100원을 주는 어플을 이용하면서 '짠테크'로 열심히 돈을 모으는 등 삶을 자신이 계획한 대로 알차게 사는 것을 일컫는 용어다. 세계에서 제일 노동 시간이 긴 나라 중 하나에 살면서도 나태 지옥에 갈까 걱정하는 한국인들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행 같기도. 인터넷에서는 이런 갓생의 기운이 가장 넘쳐나는 시공간에 대한 간증글이 여럿 올라와 있다.
새벽 첫차, 카공족들 많은 카페, 회사들이 몰려 있는 여의도, 그리고
위의 '6시 타임 수영장'이라는 댓글처럼 새벽, 아침 헬스장이 대표적이다. 나는 오늘 아침 8시 20분에 크로스핏을 다녀왔다. 내가 다니는 박스가 새벽 6시부터 첫 수업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다른 곳에 비해 첫 수업이 조금 늦은 편이라 회원 분들이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도착하니 이미 새벽부터 정규 수업 전에 개인 운동을 열심히 하고 계신 분들이 있었다. "으어!" "이야!" "시X으아아알!" 우렁찬 기합과 괴력을 발휘하기 위해 발바닥부터 끌어올리는 비속어의 향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온 몸이 바위 같은 분들이 뚱뚱한 바벨을 들고 운동에 열중하시는 속에서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잘못 왔다. 집에 가야 된다.' 새벽(아침) 운동은 아무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것에는 경외, 그러니까 나는 이들에 비해 '좁쌀'에 불과하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보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코치님의 호령에 맞춰 스트레칭 중이었다.
크로스핏은 스트레칭 10분으로 웜업을 하는데 가벼운 유산소, 근력 운동이 복합되어 하고 나면 땀이 줄줄 난다. 헉헉 숨을 몰아 쉬고 있는데 오늘의 와드 설명이 이어졌다.
1. Strength 스트렝스
'힘'을 키우는 운동인데 매월 한 차례 이상 종목을 바꿔 진행된다. 어제는 백 스쿼트였는데 오늘은 숄더 프레스. 바벨에 무거운 원판을 끼워가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 무게의 85퍼센트를 찾아 이 무게로 3번씩 총 5번을 드는 것이다. 나와 함께 스트렝스를 번갈아 진행할 여자 회원 분은 4개월 이상 크로스핏을 다니신 숙련자였다. 게다가 아침 운동을 하신 뒤 출근하시는 갓생러였다. 스트렝스가 익숙지 않은데 수준을 비슷하게 맞춰야 할 것 같아서 더 긴장이 되었다. 옆에서 남자 회원 분들이 으랏차차 숄더 프레스를 하시는 모습에 더욱 위축되기도 했다. 나는 좁X, 아니 좁쌀이었다.
회원 분과 나는 양쪽에 10파운드 원판과 5파운드 원판을 번갈아 끼워가며 적절한 무게를 찾았다. 최종적으로 양쪽에 10파운드 원판, 5파운드 원판을 끼어 봉의 무게 15kg를 합친 총 50파운드의 무게를 들기로 결정. 가능한 무게라고는 하지만 어깨로 세 번을 연속으로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부들부들 떨면서도 숄더 프레스를 해낼 수 있었던 건 코치님이 서둘러 오셔서 등 뒤에서 힘을 보태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회원 분들이 바벨에 깔릴 것 같을 때도 등 뒤에서 지지해주는 힘으로 다들 자신의 몫을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강건해 보이지만 다들 나처럼 저마다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괜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자기 비하에 빠져 다른 사람과 비교가 심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본격적인 오늘의 와드는 신디 Cindy였다. 여성 이름을 딴 와드를 걸스네임 와드라고 하는데(작전 중 순국한 군인들의 이름을 딴 히어로 네임도 있다) 신디라는 이름의 유명한 크로스피터에서 유래된 것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그냥 이 루틴을 신디라고 명명한 듯하다. 아무튼 20분 동안 풀업 5번, 푸쉬업 10번, 스쿼트 15번을 한 라운드로 가장 많이 해내면 되는 맨몸 운동이다. 나는 밴드 풀업으로 대체했다. 여성 기준 20번 이상을 하면 우수한 성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노렙 포함^^;) 12번을 하고 안간힘을 써서 스쿼트 2번을 더 했다. 무거운 바벨을 드는 동작이 없이 맨몸 운동만으로도 20분이 꽉 찼다. amrap의 장점이 오늘 톡톡히 발휘되었다. As many round as possible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같이 시작해서 같이 끝난다. 그래서 남들보다 늦는다고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온전히 페이스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좁쌀이지만 좁쌀 만큼의 몫만 해내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을 해내면 알이 꽉 찬 쌀로 성장할 수 있겠지!
"소연 님, B에 이름 쓰셔야죠!" "네?" 내가 평소처럼 가장 낮은 단계인 C단계에 이름을 쓰려고 하자 코치님이 말렸다. "오늘 니 푸시업 안 하셨잖아요. 그럼 B죠!" 내가 B라니, 아직 바벨은 무게가 적어 C이지만 맨몸 운동에서는 B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뿌듯했다. 어쩌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좁쌀의 시기, 소위 X팔리는 시기를 견뎌내야 하는 게 아닐까. 부끄럽지만 참고 해내다 보면 부족한 나를 어느 순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마치 링 위에서 안간힘을 쓰는 최약체를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는 것처럼 나를 격려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부끄러움은 지나가고 그걸 해낸 '내'가 남는다. 좁쌀의 시기를 견뎌낼 용기를 내자. 오늘의 크로스핏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