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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Aug 28. 2020

가만히 좋아하는   

  그  마음이 나는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에 빠지는 일은 점점 드물어졌다.  

20대와 30대를 거치며 사람을 보는 데 혜안이 생긴 것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특별해 보여도 그 뒤는 '뭐, 나랑 얼마나 다르겠어. 다 거기서 거기지' 같은 마음. 

20대와 30대 중반까진 일로 만난 사이여도 처음 만난 사이여도 오래된 사이여도 

이성 앞에선 예뻐 보이고 싶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별로 그렇지 않다. 

지금은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나 편한 게 제일이고, 나 좋은 게 제일이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물건이나 집이나 풍경이나 드라마 속 인물 말고, 

사람에게 반하고, 설레고, 기대하고, 두근거린 일이 언제였던가...

가장 최근의 그러니까 가장 마지막이었던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 보면 

까마득한 옛날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1. 호의와 호감 사이 


내가 느낀 그의 첫인상은 소년 같구나, 였다.   

젊은 시절 박해일 배우의 얼굴 중 선한 얼굴에 가깝다고 나 혼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나이가 어린 건 아니었고, 나보다 어리긴 했지만, 30대 후반의 남자에게서 나올 법한 인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아마 그를 한 번 더 눈여겨본 이유였으리라. 염색이나 펌을 하지 않은 머리, 청바지와 맨투맨, 운동화에 검정 롱 패딩.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난과 평범함으로 그다지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내 눈에는 띄었던 이유였으리라. 

 

그는 다큐 후반 작업에 갑자기 투입된 사람이라 서로를 알아가고 말고 할 여유도 없었다. 

일에 바빴고, 각자의 공간에 박혀 일을 하느라 하루에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처음 일주일이 지나갔다. 

한숨 돌릴 무렵, 밤늦게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대신하느라 처음으로 팀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내 옆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는 그가 보였고, 내가 냉큼  "이쪽으로 당겨와 앉아요." 하며 

그의 의자를 끌어와 당겼는데, 그는 좀 당황한 모양이었다. 내쪽으로 굴러오던 의자 바퀴를 발끝으로 세우는 걸 느낀 나도 조금 당황했다. 아니 내 뜻은, 그렇게 멀리 앉아서 김치가 손에 닿냐, 였는데, 다른 뜻은 없었는데.

이때까진 백 퍼센트 호의였다. 우리 팀에 들어와 일해줘서 고맙다, 늦게까지 같이 고생해줘서 미안하고 고맙다... 뭐 이런 마음으로 베푼 호의.  


그러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호의는 호감으로 넘어갔고, 그도 나에게 그런 줄 알았다. 

마음이 무서운 게 그렇다. 마음이 생기는 순간, 상대방의 말과 행동 모두가 어떤 신호로 읽힌다. 

'넹' 과 '넵'과 '네~' '네 ^^'의 차이를 열심히 분석하고 해석하는 시간이 내게도 온 것이다. 젠장.   


#2.  닿을락 말락 스칠 듯 말 듯 


우르르 몰려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걷다 보니 걸음을 나란히 하게 됐고, 그러다 하필이면 때마침, 공사 중이던 인도에 맞닥뜨렸다. 

길은 좁아졌고, 우리는 나란한 걸음을 끝까지 고집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의도치 않은 (혹은 의도한) 밀착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서로 닿기도 하지 않았겠나. 

안 그런 척하면서도 온 신경이 손끝에 실리던 그 마음. 

나는 굳이 그와의 거리를 떨어뜨리려 하지 않았고, 그도 그랬다.(고 그땐 생각했다)  

그렇게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한참을 걸었다. 뛴 것도 아닌데 심장이 두근거리고 한여름도 아닌데 땀이 삐질 나고, 얼굴이 붉어지던 그때..세상 로맨틱한 순간이 나는 그런 때라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끌리던 두 사람이 나란히 걷다가 손끝이 스치다가 마침내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두 손을 맞잡는 순간, 그런 순간 말이다.  첫 키스나 첫 포옹보다 더 큰 떨림. 

그러나 우린 그 순간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3. 심야의 드라이브 


"어디 살아요?" 

내가 물었다. 목적과 의도가 분명했던 질문임을 인정한다. 

-집이 00이라고 했죠. 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요. 데려다 줄게요. 

뭐, 이런 말을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풉, 달성했다. 


시간은 새벽이었고, 단 둘이었고, 처음으로 일이 아닌 일을 주제로 대화라는 걸 했다. 그러니까 사적인 대화. 

그래 봤자 시시껄렁한 대화였지만, 아! 포항 지진이 인재냐 자연재해냐로 한참을 얘기했으니 아주 시시껄렁한 대화만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아쉽게도 내 집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고맙다 조심해서 가라...동료끼리 나눌 수 있는 인사말로 심야의 드라이브는 끝났다. 고마우니 언제 밥 한 번 사겠다는 나의 말을 그는 진심으로 차단했는데 그때, 나는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의 말과 행동은 호의였지 호감이 아니었던 것을, 나의 신호수신기에 오류가 있었음을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언제나 깨달음은 뒤에 오는 것, 지금 아는 걸 그때는 모르는 법.

이불킥을 날리게 될 날이 올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4. 달고 맛있었던 김칫국


한겨울 나에게 이른 봄바람을 일으켜주었던 그에게는 이미 여친이 있었다. 

그가 내게 했던 말이나 행동에 묻어난 다정함은 내가 처음 그와 김치와의 거리를 좁혀주려고 베푼 호의에 대한 

고마움과 호의였을 뿐.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누군가의 다정함과 친절함과 인정이 절실히 필요했던 모양이다. '밥은 먹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잠은 좀 잤어요?' '글 되게 좋은데요.' 와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 

나도 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끝내 하지는 못했다. 

아무한테나 그렇게 잘해주고 따뜻하게 굴다가는 언제고 한 번 곤란한 일이 생길 거라는 말을 못 했다. 

뱉고 나면 내가 진짜 아무나가 돼 버릴 것 같아서, 일말의 여지는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랄까. 

사실 지금도 내 생각에는 그가 나에게 한 점의 마음조차 없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호의를 호감으로 잘못 읽은 내 실수가 불러온 '봄'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그래서 한동안 혼자 꽤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좋았다. '가만히 좋아하던' 그때의 내 마음이. 


*'가만히 좋아하는'은 김사인 시인의 시집 제목입니다. 그 중 '조용한 일'이라는 시를 저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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