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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쏨 Aug 27. 2022

이 세상에 똑같은 립밤은 없다.

이 세상에 똑같은 립밤은 없다.



어릴 땐 엄마가 화장을 할 때마다 옆에 찰싹 붙어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길 좋아했다. 그때는 화장이 어른들의 영역이어서 몰래몰래 엄마의 립스틱만 발라도 어른이 된 것처럼 즐거웠는데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화장이 꽤 귀찮은 일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기술이 필요한 아이쉐도우 그라데이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정작 화장을 해야 할 어른이 되어서는 화장의 기초단계에 속하는 비비크림에서 멈춰 섰다. 약속이 있는 날을 제외하곤(약속이 있으면 비비크림까지 나아간다.) 로션 하나로 얼굴부터 발끝까지 모두 해결하는 나로서는 바르는 부위에 따라 세세하게 나누어진 아이크림, 바디로션, 핸드크림을 이해하는 것도 버거웠다. 이런 내가 화장품을 만들다니! 화장품의 성분은 고사하고 종류도 잘 모르는 내가!?


화장품의 기본값이 로션을 넘지 않는 내게
천연화장품의 세계는 정말 생소한 영역이었다.


화장의 세계에 대한 나의 무지는 겁도 없이 온라인 쇼핑몰에 접속해 천연재료를 구입하려는 대담함으로 드러났다.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끝나지 않는 수 백 개가 넘어가는 천연재료를 모니터로 바라보며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산산조각 났다. 이게 대체 다 무슨 말이지? 라벤더 워터를 검색하면 라벤더 워터를 시작으로 라벤더 하이드로졸 워터, 라벤더 워터 영국산, 라벤더 워터 볼리비아산을 거쳐 결국 장바구니가 라벤더로 가득 차길 반복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홈페이지 끝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오프라인 매장주소를 메모했다. 천연재료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선반장이 미로처럼 길을 낸 방산시장 안 2층 매장으로 들어섰다. 사장님의 재료 설명과 추천 덕에 고뇌의 시간을 줄일 수 있었지만 수백 개의 재료들에 짓눌려 어지러운 것은 모니터 안이나 밖이나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재료를 양손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야 비로소 ‘화장품이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무지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재료를 구입하자 어떤 재료를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내가 만드는 화장품을 사용할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었다. 똑같은 용기에 담겨있어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내용물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나의 취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똑같은 립밤은 있을 수 없다고!




입술이 자주 찢어지거나 부르터서 피가 나는 경우에는 상처 치유에 좋은 타마누 오일을 다섯 방울 넣어준다. 입술이 반짝반짝거리는 생기발랄함을 추가하고 싶다면 비즈왁스 대신 킨릴라 왁스를 사용한다. 입술과 함께 인중과 턱, 혹은 안면홍조로 상기되어 따끔따끔 거리는 볼까지 넓은 부위에 바르고 싶다면 고보습 오일인 햄프 시드 오일을 서너 방울 첨가하거나 시어버터를 추가한다. 탱글탱글한 입술을 원한다면 피부에 자극을 주는 멘톨이나 고추 추출물, 생강 오일을 소량 첨가하여 입술을 부풀게 만들 수 있다. 같은 재료가 사용되어도 첨가물의 용량과 비율에 따라 다른 효과를 가져와서 만들 때마다 다른 이름을 가진 립밤이 탄생했다. 이 과정이 즐거웠던 이유는 내가 만든 립밤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휴대성을 핑계로 작게 만들어진 립밤은 아무리 예쁜 캐릭터가 올라간 용기의 립밤을 구매해도 몇 번 사용하면 잃어버리기 일쑤였는데, 만들어 쓰기 시작한 후로는 립밤이 사라지지 않았다. 잃어버리기는커녕 나중에는 면봉으로 파고파서 설거지한 듯이 용기가 깨끗해질 때까지 사용했다. 친구의 거칠거칠한 입술이 보드라워지고 아이들의 상기되어 따끔거렸던 양 볼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다 썼는데 살 수는 없냐는 지인의 카톡을 받을 때마다 누군가를 위한 하나뿐인 립밤을 만든다는 사실 떠올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는 5g의 작은 용기를 채우는 내가 서 있다.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오늘도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뿐인 화장품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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