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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쏨 Oct 01. 2022

적정온도에 만나는 일


화장품은 기본적으로 기름과 물이 섞여 만들어진다. 아이들의 과학실험에 자주 등장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면, ‘기름과 물은?’ 안 섞인다. 문과생이었던 나는 평생토록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다는 기본 답안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세제를 넣으면 되잖아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름과 물을 섞어 휘휘. 아무리 속도를 올려 저어도 층이 나눠지는 기름과 물을 관찰한 뒤 엄마가 준비한 세제 한 방울에 층이 없어지는 마법 같은 실험을 지나온 아이들이 건네는 당연한 질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세제는 두 성분을 분해하는 물질이므로, 기름과 물 각각의 성분을 파괴하지 않고 하나의 물질로 만들고 싶은 화장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성분을 분해하는 세정제도 할 말이 많지만, 차차 하기로 하자. 지금은 성분을 섞는 게 더 중요하니까.)


간혹 엄마가 아빠를 이야기하며 ‘으이그, 우리는 물과 불이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는 늘 ‘으이그’를 깔고 간다.), 39년째 함께 하시는 걸 보면 ‘엄마와 아빠는 물과 기름 같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다. 물과 불은 여지가 없지만,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



“그래서 어떻게 섞는 건데!?”

불같은 분들의 목소리가 들리니 어서 빨리 답을 해야겠다.


물과 기름을 섞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유화제와 비슷한 온도.” 유화제는 올리브 오일에서 추출한 것으로 올리브 오일 알코올을 결합시켜 지방산을 에스테르화시킨 것으로 어쩌고저쩌고 하는 화학 이야기가 있지만 또 불같은 분들이 눈에 아른거려 자꾸 문장을 썼다 지우게 된다. 어쨌든 올리브에서 추출된 천연재료 중 하나이고 이 재료 서로 섞이지 않는 두 물질을 섞기 위해 꼭 필요하다.


하지만 물과 기름을 섞는 교반이 일어나기 위해 더 중요한 것은 ‘온도’다. 오일은 높은 온도와 공기의 노출 정도에 따라 기능이 떨어진다. 조심스럽게 핫플레이트에 계량된 오일을 올려둔다. 핫플레이트를 켜는 둥 마는 둥 미지근하게 켜두고 오일의 온도가 올라갈 때까지 지켜본다. (‘기다린다’라는 표현보다 ‘지켜본다.’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오일은 워터에 비해 계량되는 양이 적어 쉽게 온도가 화르륵 올랐다가 주르륵 내리기에 한눈을 팔게 되면 순식간에 온도가 올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워터류는 정 반대다. 오일에 비해 사용량이 많기도 하지만 천천히 온도가 오르고 한번 올라간 온도가 쉽게 내려가지도 않는다. 화르륵 타오르는 기름과 세상 느긋한 물이 똑같은 온도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고로 이 둘을 섞는 것에는 굉장한 타이밍이 필요하다.


오일과 물이 교반이 잘 일어나는 온도는 60-70도 사이다. 보통은 65도에서 둘을 섞는다. 온도가 맞지 않아 교반이 잘 일어나지 않으면 보통은 ‘아잇 (교반이) 깨졌다’라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깨질 때와 비슷한 효과음이 앞에 붙는다.) 기름과 물이 엉성하게 섞여있는 모습은 대체로 흉하다. 아예 섞이지 않은 이전 상태, 오일과 워터의 층이 나뉘어 있는 깔끔했던 초반이 생각나면 대충 섞이는 것보단 아예 섞이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깨진 교반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뒤엉킨 채로 몽글몽글한 재료들을 다시 섞기 위해 핫 프레이트에 올려 다시 온도를 올리는 것을 선택한다. 이미 한 비커에 뒤엉켜있으니 같은 온도를 맞추기는 쉬워지지만 완성 후 묘하게 부족한 사용감을 느낄 때면 포스트잇 커플로 불리던 지난 연애가 떠오른다. (이 연애는 결국 깨졌다.)


화르륵 오일과 느긋한 워터를 한 비커에 섞었을 때 완벽한 교반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온도가 내려가는 속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온도차를 같은 온도로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찬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에 재료가 들어있는 비커를 담가 빠르게 식히는 것이다. 양동이의 물을 두세 번 정도 갈아주면 그제야 하나로 섞인 로션과 크림이 완성된다.

미리캔버스 작업물 @해피쏨


이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첨가물을 넣을 수 있게 된다. 섞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첨가할 수 없다. 첨가물로 기본 값 이상의 효과를 내고 싶다면, 일단은 섞여야 한다.  




같은 온도에서 시작해 같은 온도로 끝나는 이 과정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도 많이 닮아있다. 아이가 ‘친구가 하는 말 때문에 자꾸 나는 속상해져’라는 고민을 털어놓을 때


 ‘너와 비슷한 말을 하는 친구들을 찾아봐.’


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온도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 서서 관찰하다 보면 적정온도를 만났을 때 놓치지 않을 수 있겠지.라는 바람을 함께 담아본다.  


누가 봐도 기포 하나 없이 하나의 물질로 보이는 매끈하고 반짝이는 로션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각각의 재료들은 각자의 적정온도를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온도를 가진 사람들처럼. 살면서 마주치는 여러 온도의 사람들과 첨가물을 넣을 만한 관계가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나의 온도를 맞춰간다.


 기포 없이 매끈한 관계를 위하여!
부드럽고 효과 좋은 화장품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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