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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쏨 Nov 12. 2022

어차피 섞일지라도,

순서가 중요하다

어차피 섞일지라도, 순서가 중요하다



 1.

‘스프 먼저 넣을게~’라고 말하는 순간 전쟁이 시작된다.

‘야 물 끓었어?’  

‘아 뭐래, 그냥 찬물에 다 넣어도 돼.’

‘뭐라는 거야, 당연히 끓는 물에 넣어야지!!’


매번 이렇게 논쟁거리가 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는 학창 시절 '기술/가정'에서(아직도 이 과목이 있는지 모르겠다.) 시험문제로 [라면의 첫 번째 조리 순서는?] 이란 문제를 풀었어야 했다. 이 문제를 읽자마자 아마 각자의 조리 순서가 머릿속에 떠오르시겠지만, 의외로 이 문제 정답은 정해져 있다. 바로 라면 봉투 뒷면에 적힌 표준 조리법이다. 라면 하나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수 천 번을 끓여본다는 라면연구원이 작성한 것이니 이보다 더 확실한 정답이 있으랴. 그렇다면 정답은?


대부분의 라면 봉투에 적힌 표준 조리법은 ‘물이 끓은 후’로 시작한다. 물을 먼저 끓이는 것 외에 스프니 면이니 후레이크니 하는 재료들은 ‘모두 함께 넣는다.’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나는 ‘찬물에 몽땅 처음부터 모든 재료를 넣고 끓이는 라면’이 맛있다. 문제가 [라면이 ‘가장 맛있어지는’ 첫 번째 조리순서는?]이라고 나왔다면 출제자는 복수정답의 논란에 휘말릴 것이 틀림없다. 그렇대도 다수결이 존중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소수의 의견일 수밖에 없는 찬물 조리방식은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찬물에 모든 재료를 넣고 끓이는 것이 게으름이나 귀찮음의 방식으로 여겨지던 보통날, 한 물리학자가 찬물 조리 시에 더 맛있어지는 라면에 대한 의견을 냈다. 실험을 운운하며 근거 있는 자료를 제시하는 그의 논리에 드디어 표준 조리법에 정면 승부할 수 있는 찬물 조리 시대가 왔다며 속으로 환호했다.  


실험에 따르면 면에 들어있는 글루텐 성분이 차가운 물에서 풀어지지 않아서 찬물 조리 시 라면 면발이 더 쫄깃해진다고 한다.  세상에! 그렇다. 나는 과자처럼 꼬들꼬들 씹히는 설익은 라면을 좋아한다. 이로써 나는 그동안 만사가 귀찮고 게으른 인간이라는 오해의 테두리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취향에서 오는 오해를 굳이 풀려고 애쓰지 않는 나태함도 발견했다. 그럼에도 이제는 찬물에 라면봉지 속 모든 재료를 탈탈 털어 넣으며 ‘귀찮아서가 아니라고!’ 라며 당당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얻은 것이 많다고 위로한다.    

     

     



2.

데운 우유를 마실 때 혀에 남는 묵직한 맛이 싫어서 손끝이 시릴 정도로 한 겨울이 아니면 차가운 우유를 마신다. 그날은 아이에게 코코아를 타 주기 위해 빈 컵에 파우더를 넣고 찬 우유를 부은 후에 더 열심히 휘휘 저었다. 아무리 휘저어도 녹을 생각이 없는 코코아 가루가 몇 뭉치 떠있는 채로 아이에게 잔을 넘겼다. 역시 학교가 끝나고 당이 떨어질 땐 초코우유라며 노인처럼 코코아 한잔의 여유를 즐기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찬 우유를 먼저 넣고 코코아 가루를 넣는 게 훨씬 잘 녹아요.’

‘에이 그럴 리가! 우유가 뜨거운 것도 아니고 뭘 먼저 넣는다고 파우더가 잘 녹을 리가?’


떨어진 당은 채워졌지만 나는 다시 빈 컵을 들었다. 아이의 말대로 찬 우유를 먼저 넣고 파우더를 넣어보았다. 찬 우유 위에 카멜색의 코코 아산이 쌓였다. 그리고 서서히 코코아 가루가 우유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모든 실험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독립변수 외에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또다시 열심히 휘휘 휘휘 저었다. 여전히 완전히 녹지 않은 코코아 파우더가 뭉쳐 둥둥 떠다녔다.


보기엔 파우더를 먼저 넣었을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반전의 결과는 코코아를 마신 후에 나타났다. 우유를 먼저 넣은 코코아는 다 마신 후 코코아 파우더가 남지 않은 반면, 파우더를 먼저 넣은 쪽은 다 마신 후에도 컵 아래 1/4 이상 코코아 파우더가 녹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머, 진짜네? 섞는 순서가 이렇게 중요하다고?

물리학자처럼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지만, 자기 말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아이를 보며 찬물라면 조리 이후로 대단한 발견이라고 생각했다.





3.

그러고 보니, 천연화장품을 만들 때도 ‘물에 기름을 넣느냐, 기름에 물을 넣느냐’에 따라 완성품의 사용감이 달라진다. 이게 무슨 말장난이냐고 생각하신다면 다시 한번 한국인의 피할 수 없는 논제 찬물라면과 초등 아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든 코코아 가루를 떠올려 주시기 바란다. 더불어, 같은 로션이어도 어떤 제품은 물 세안만으로도 씻은 느낌이 드는데 어떤 제품은 꼭 세정제를 사용해야 깨끗이 닦이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다면 이 말장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가 조금 수월해진다. 라면이나 코코아처럼 직접 먹어보기 전에 완성작만 놓고 보면 과정의 차이가 보이지 않지만 사용하면 알게 되는 미묘한 차이가  재료를 섞는 순서에서 온다는 것을.  


모든 화장품은 기름과 물이 섞여 만들어지고, 이 두 재료를 섞는 방법에는 ‘Oil in Water (O/W) 형’과 ‘Water in Oil(W/O) 형’이 있다.


두 재료가 섞일 때 나중에 들어오는 입자가 본래 있던 입자 사이로 분산되는데, O/W형은 워터류가 담긴 비커에 오일을 넣어서 기름을 작은 입자로 물속에 분산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완성된 화장품은 상대적으로 큰 입자인 수분이 피부에 먼저 닿아 가볍게 스며든다. 수분이 많이 함유된 로션이나 스킨류의 화장수가 여기에 속한다.


반대로 오일류가 들어있는 비커에 워터를 넣는 W/O형은, 기름 속에 물이 작은 입자로 분산되어 오일 성분이 피부에 먼저 닿는다. 조금 찐득하고 무거운 느낌으로 발리지만 촉촉함을 오래 유지하는 크림 종류가 여기에 해당된다.


수분이 주성분인 경우에는 끈적거리진 않지만 금방 증발되고 물 세안만으로도 세정이 가능하다. 오일이 주성분인 경우에는 끈적거리지만 쉽게 증발되지 않고 촉촉함이 오래 지속되나 깨끗한 세정을 위해 세정제가 필요하다. 물속에 기름을... 아니 기름 속에 물을... 자꾸 반복하다 보니 쓰는 사람도 헛갈리는데 읽는 사람은 오죽할까 싶다. 이쯤 되면 '아니 어차피 섞을 건데  뭣이 중헌디!' 라고 소리치고 싶으실지도.  




그렇다. 어차피 섞인다. 모든 재료를 완전한 하나의 물질로 섞기 위해 날이 선 블렌더도 사용하고 팔이 떨어지게 주걱질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완성된 제품의 보이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섞이게 될지라도, 설사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무엇을 먼저 넣을 것인가?


그것은 당신의 기호일수도,

혹은 당신의 피부에 필요한 성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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