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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Aug 29. 2023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2 동해항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직접 가보는 러시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학창 시절부터 도서관에만 가면 여행서적부터 찾던 나는 부지런하게 준비를 마치고 여유롭게 출국 날짜만을 기다리는 작가가 없음에 의아해하곤 했다. 제주도 여행도 아니고, 무려 세계일주를 시작하기 직전인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게으르다니. 아무리 준비할 게 많다고 해도 하루이틀 전에 로밍, 보험, 은행 등등을 급히 챙기고 다이소에 뛰어가는지 열일곱 열여덟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결국 책을 덮을 땐 ‘와! 정말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어! 나도 언젠간!'하고 감탄하곤 했지만.


동해-블라디보스토크 노선을 운영하고 있던 페리. 생각보다 배가 크고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boybeen
페리 안에서 식사가 영 아쉽다는 숱한 후기를 보며 인스턴트를 챙겨갔었다. 뜨거운 물이나 전자레인지는 있어서 간단히 해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boybeen


근데 내가 딱 그렇게 하고 있었다. 대학교를 자퇴하니 마니 거창한 제목을 걸고 동네방네 소문도 냈으면서, 그래서 이제는 안 갈 수가 없다면서 떵떵거리고 다녔으면서 출발 직전까지 닫히지 않는 배낭 지퍼와 싸우고 있었다. 분명 50L를 고르고는 너무 크지 않을까 후회했던 것도 같은데, 나름 검소하다 생각했던 짐들이 그 큰 가방 안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결국 짐을 나누고, 몇 가지를 빼는 것으로 타협했다. 짐을 덜어내는 건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기차역 플랫폼에서 엄마랑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도 "그 바지 여기서 급하게 하면 뺄 수 있을까?"였으니 이해할 수 없던 게으른 여행자가 직접 되어 버린 순간이었고, 내 여행이 정말 시작해 버린 순간이기도 했다.


"러시아에도 옷 가게는 있을 테니 급하면 사라"는 엄마의 말과 함께 바지 하나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가방을 메고 포항-동대구-정동진으로 가는 밤기차를 탔다.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여객선을 타기로 했기 때문. 말이 밤기차지, 불도 안 꺼주고 침대도 없는 무궁화호를 탔던 건 다양한 '겸사겸사’의 사정이었다. 한 달 전에 다녀온 국외 탐방 대외활동 덕에 육로로 러시아를 몇 번 통과했었는데, 흔치 않게 버스, 기차, 비행기가 그려진 출입국 도장이 모두 여권에 찍혀있어서 배도 갖고 싶었다. (사실 이 도장이 가장 큰 이유였고, 이다음부터는 이유를 끼워 맞췄다.) 그리고 인천행 항공편을 편도로 예매해 둔 터라 러시아 입국 교통편을 편도로 구입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편도를 두 번 끊으면 왕복보다는 비싸다 보니 시간대와 가격을 고려했을 때 배가 가장 합리적이었다.


도착할 때 쯤 보였던 블라디보스토크 대교. 3,100m 길이에 324m 높이, 4차선이니 꽤 규모가 크다. ⓒboybeen 
도착하기 전 궁금해서 갔었던 뷔페 가는 길. 식사는 그렇게까지(?) 맛있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1달 간 짜장밥에 김치를 올려 먹을 일도 많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boybeen


5-6시쯤 되었을까, 일출 명소답게 해가 환했던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며 이런저런 일들로 서울에 왔을 때 괜히 바로 내려가기가 싫다며 자주 왔던 곳이었다. 무려 청량리-정동진-부산을 무궁화호로 일주하는 이동시간만 10시간이 넘는 이상한 전국일주 코스였는데, 강과 바다, 들판과 산, 폐역과 광산이 어우러지는 패키지 같은 바깥 풍경이 좋았다. 친구들에게 몇 번 추천해 줬다가 10시간 동안 뭘 하냐는 질문에 그냥 밖을 보면 재밌다고 대답했더니 아무도 이해해주진 않았지만, 20대 초반은 그래서 더 힙하고 멋지다고 생각할 나이였으므로 난 남들보다 화려하게 부산행을 택해왔다. 아무튼 그래서 그날의 정동진이 어색했다. 모든 일정, 어쩌면 도전을 잘 마무리하고 집에 가는 순간에 정동진이 있었는데, 집을 떠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정동진에 오다니. 그 마음과 앞뒤로 멘 가방의 무게가 아직 익숙지 않아 정동진역 플랫폼 벤치에 가방을 내려두고 잠시 누웠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하긴 힘든 일이다. 고작 그게 뭐라고, 잠시 누우면 되는데 우린 그런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스물 하나, 첫 제주도 여행 중에 배차 간격이 거의 한 시간쯤 되었던 버스를 기다렸던 적이 있다. 10일의 여행에 중반쯤, 첫 배낭여행이 예상보다 피곤하고 어려웠던 탓에 많이 지쳐있었던 나는 아무도 없는 정류장 벤치에 누워버렸다. 서 있다가 누운 그 5초 사이에 시야가 하늘로 가득 찼다. 그게 또 왜 그리 갑자기 좋았는지, 실실 웃으면서 버스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스물셋, 정동진의 하늘은 갓 떠오른 해와 흰 구름이 섞여 파란 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매일의 일출은 다 똑같을 텐데 평일의 일출은 참 평화롭다는 생각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고 근처 순두부찌개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1000원을 추가하면 전복을 한 마리 넣어준다고 하기에 그러자고 했다. 그 전복 하나가 나중에 큰 힘이 되어줄 것만 같아서.


동해역에 도착하자 항구와 정말 가까워진 듯 ‘러시아 음식점 - 카자흐스탄 식당’이라는 모호한 이름의 식당이 있었다. 10분 정도 굉장히 낯선 시골 읍내 같은 길을 걸어 동해항 여객선터미널에 들어서자 러시아인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러시아에 가는 배를 기다리는 러시아인이 많다는 사실이 왜 신기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와 같은 까만색 카라티를 입은 단체 탐방단으로 보이는 한국인 대학생들도 웃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한 달 전엔 나도 저렇게 국외 탐방을 갔었는데, 이제 혼자가 된 나는 웃을 정신이 없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려인쯤 되는 현지인인 척 연기하면서 속으로는 엄청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어도 잘하고, 한두 번 승선한 게 아니니 네 할 일이나 하라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배 위에서 바라본 밤은 생각보다 더 깜깜하다. 망망대해라는 말이 이런 거구나, 이런 어둠 속에 이 배 하나만 있는 기분은 한 번 쯤 느껴볼 만 하다. ⓒboybeen
한 숨 자고, 맥주도 마시고, 밥도 먹으니 기분이 좋아져서 그제야 배 곳곳을 둘러보았다. 페인트의 거친 표면과 거친 동해의 밤바다가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순간. ⓒboybeen


배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컸고, 벙커침대석으로 예매했던 내 객실은 꽤나 아늑하고 좋았다. 그런데, 정말 출발해 버리자 예상치 못하게 우울해졌다. 이 배에 나를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 그런 상황 속에서 오롯이 나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택한 여행이지만 첫 순간은 쉽지 않았다. 우선은 뭐라도 먹으면 나아질까 싶어 인스턴트 떡국을 꺼냈다. 바다를 보며 한숨을 두어 번 푹푹 쉬어도 유독 익지 않았다. 결국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오후 8시쯤 방송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일몰시간에 맞춰 설정해 둔 알람은 무용지물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다 우연히 본 선상에서의 일몰에 감탄하며, 그런 걸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 설렜던 나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는 나 자신에 억울해졌다. 내가 행복해지고 싶어서 시작한 건데.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도전하고 이겨낼 여행인데. 나를 탓할 이유를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먹을 것을 잔뜩 들고 갑판으로 갔다. 이제부터 펼쳐질 한 달은 오롯이 나의 시간이다. 일 분 일 초라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맥주와 과자, 컵밥 등등을 마구 씹으며,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셀카도 수십 장씩 찍었다. 단순하게도 취하니 기분이 좋아져서는 잃어버리는 게 내 목숨만 아니면 됐다고 생각하며 망망대해의 별을 위해 오아시스의 샴페인 슈퍼노바를 들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본 것 같기도 했던 밤바다 위에서.


일몰은 놓쳤고, 일출을 기대하며 일찍 일어났지만 흐렸다. 원했던 결과는 아니지만 예상치 못한 멋진 풍경과 최선을 다한 나 자신이 꽤나 좋았던 아침. ⓒboyb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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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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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편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버지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자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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