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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Aug 31. 2023

'끝내주는 그 가게'를 알려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3 블라디보스토크 上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직접 가보는 러시아


“할아버지. 이제 출발하실까요?”


망망대해를 건너 아무튼 배는 러시아에 무사히 도착했고, 나는 전날 밤에 마음을 정리한 덕에 기분 좋게 들떠있었다. 그럼에도 약간의 긴장감은 있었는데, 러시아에 도착했다는 사실도 컸지만 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첫날을 한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혀 예정에 없던 동행이었다. 달갑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첫 시작부터 예상을 비껴가는 게 꽤 배낭여행스럽다고 느껴져서 오히려 좋았다.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일출을 위해 세수도 하지 않고 올라간 오전 5시 경의 갑판에서였다.


시베리아횡단열차 블라디보스토크-모스크바 노선은 총 9,288km이다.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갈 경우 10,000km가 넘는 대여정인 셈이다. ⓒboybeen
블라디보스토크는 여객선터미널과 기차역이 붙어 있다. 도시 중심에 있고, 가장 번화가인 아르바트 거리와도 도보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도심 관광 시 필수 코스다. ⓒboybeen


되도 않는 걱정과 자책 속에 일몰을 보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었던 나는 기필코 일출을 보리라 다짐하며 잠들었다. 전역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지만 훈련병 기상하듯 뛰어나간 갑판엔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영 분위기가 오묘했다. 밝아지는 것 같지만 구름이 너무 많았기 때문. 그래, 이거도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아침에 계획대로 잘 일어났고, 그렇게 내 템포를 찾아가는 여행자가 되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하며 꿋꿋하게 가이드북을 읽고 있었는데 누군가 “학생, 횡단열차 여행하러 왔어요?”라고 물어보셨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니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웃고 계셨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일흔다섯이신 할아버지께선 젊은 시절 선원 생활을 하시다가 최근까지 관련 사업을 하셨고, 퇴직 후 세계를 누비고 계신 분이셨다. 이번엔 바이칼을 보시고 몽골, 중국을 일주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올라온 삶의 계단의 수는 다름에도 여행자 대 여행자로 이야기하는 순간이라니,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긴 했지만 감사한 순간이었다. 그러다 러시아어 전공이라고 말씀드리니 심카드 사는 걸 도와줄 수 있냐고 여쭤보셨고, 얼떨결에 첫날을 함께하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 기분은 오묘했다. 솔직히는 믿어도 될지 의심하기도 했지만 나는 늘 너무 많은 걸 생각하다 중요한 작은 걸 놓치곤 했으니 이번엔 나 같지 않은 선택을 해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앙 광장. 혁명 광장이라고도 불리는데, 뜻은 생각하는 그것이 맞고, 이런 이름은 대부분의 도시에 꼭 있다. 약간씩 다른 포인트를 발견하는 재미. ⓒboybeen
사실 이런 무서운 이름의 광장의 동상엔 항상 갈매기나 비둘기들이 앉아 있다. ⓒboybeen


그런데! 함께 입국장을 통과한 후부터 문제가 생겼다. 당일 저녁 기차를 탑승할 예정인 할아버지의 가방을 맡기기 위해 역 곳곳을 뒤졌으나 짐 보관소(역마다 있음)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나처럼 족히 50L는 넘는 대형 가방을 메고 계셨으니 필히 짐을 어딘가에 맡겨야 했다. 가이드북에는 물론이고, 국외 대외활동으로 잠시 왔을 때에도 있다고 들었는데 내 눈에만 안 보였다. 그런데 헤매는 우리를 불쌍하게 본 것인지 무안에서 왔다는 러시아 아저씨께서 도와주고 싶다고 하셨다. 무안? 전라남도 그 무안이 맞았다. 공감해드리고 싶었지만 무안엔 무엇이 유명한 지도 잘 몰라 우물거리면서 '무뚝뚝해도 나름 친절한 나라였던 건가' 싶었다. 아무튼 덕분에 무사히 가방을 맡긴 후에 감사하다고 연신 스파씨바(Спасибо)를 외쳤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 답변을 계속했다. 보통은 천만에요라는 뜻의 빠좔루스타(Пожалуйста)를 짧게 건네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현지에서의 회화는 조금 다른 걸까? 아니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가게를 뜻하는 마가진(Магазин)에 가자고 계속 그러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좋은 형용사는 모두 붙이고 있었다. 멋진, 커다란, 예쁜, 황홀한... 그러다 난 일평생 쫄보로 살아온 감을 할아버지께 조용히 보고한 후, 감사하지만 미안하다며 나름 아는 표현을 다 내어 놓고는 후다닥 도망쳤다.


다행히 그 후엔 아무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다. 개인 여행은 처음이지만, 국외 대외활동으로 블라디보스토크는 몇 차례 왔었기 때문. 특히 도심 관광지가 넓게 퍼져있지 않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함께 걷기에도 충분했다. 할아버지의 여행 일정에 맞게 수 십 가지를 따져가며 심카드를 샀고, 중앙광장, 아르바트 거리까지 가이드해 드렸다. 역사, 문화, 유행하는 아이템까지 잘도 모르지만 주워 들었던 온갖 잡상식들을 총동원하면서. 무사히 도착한 해양공원에서 넓게 뻗은 태평양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께선 고맙다며 블라디보스토크의 특산물인 곰새우와 생맥주를 사주셨다. 첫 여행에서의 첫 동행에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으로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할아버지께선 제대로 식사를 한 번 대접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늦은 저녁 시간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시간도 조금 남아 있으니 아는 식당이 있으면 같이 가자고 하셨다. 죄송한 마음에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아무래도 어린 나를 든든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신 것 같아 그나마 편히 드실 수 있도록 역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마땅한 식당이 나오지 않았다. 대충 만두나 도시락 컵라면으로 첫날을 때울 생각이었던 나는 식당을 잘 몰랐었고, 그나마 몇 개 아는 식당은 웨이팅이 너무 길었다. '이를 어쩌나'하다 '이건 또 이상한 것 같은데' 싶었던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게 된 게 실수였다. 무안에서 왔다던 아저씨가 아까보다 더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


블라디보스토크의 랜드마크. APEC 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도시가 전면 개편되며 만들어진 대교다. 독수리언덕에서 보는 뷰가 유명하다. ⓒboybeen


대체 이 아저씨는 같이 도착했는데 왜 집에 안 갔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는 안 볼 생각으로 도망쳤는데 또 만나게 되다니. 우선 인사를 받았으니 인사를 했다. 아까 경고음을 냈던 쫄보의 감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1%는 있으니까. 근데 내 감이 맞았다. 그 아저씨는 꽤나 취해있었다. 러시아는 의외로 길거리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된 나라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술병을 들고 이렇게까지 취한 현지인이라니, 이건 정말 잘못된 사인이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러더니 아까 그 ‘가게’에 초대하고 싶다고, 술이 취하지 않았을 땐 못 들었던 몇 가지 말이 더 붙었다. ‘여자 종업원이 예쁘고 착하다’는 어눌한 말과 분주한 손짓으로 그 가게를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섬뜩한 느낌이 와버렸다. 이상한 업소구나. 잘못 들어간 으슥한 뒷골목에서 끝내주는 가게를 를 권유하는 술 취한 아저씨와 마주하게 된 상황, 나는 할아버지를 무사히 역까지 모셔드려야 했다.


이걸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 뒤에 계신 할아버지에게 작게 말했다. “아까 말하던 가게가 이상한 곳 같아요. 뒤에 보이는 패키지 투어에 끼어서 역으로 바로 뛰어요.” 할아버지께선 단박에 상황을 이해하셨고, 그 아저씨에게도 꽤 화가 나신 듯했다. 고마운데 됐다는 말을 되도 않는 러시아어로 하며 애써 시간을 끌다가, 신호가 바뀌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할아버지와 같이 뛰었다. 아저씨는 술에 된통 취한 탓인지 따라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역까지 무사히 들어오자 그제야 숨이 가쁜 게 느껴졌다. 첫날, 정말 스펙타클했다.


할아버지와는 아쉽게도 식사를 하지 못하고 역에서 헤어졌다. 식당도 찾고, 이상한 아저씨도 쫓아내느라 기차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다른 것보다 아까와 같은 상황을 겪으신 후에 밤길에 숙소에 돌아갈 나를 걱정하셨던 것이 더 컸다. 조금이라도 밝고, 나름대로 퇴근길이라 사람도 많을 때 꼭 대로변으로 걸어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기차표 티켓을 실물로 교환하고, 플랫폼 넘버와 위치도 설명해 드린 후에서야 여행자로서 첫 만남과 첫 이별을 마무리했다. 아직까지도 더 잘해드리지 못해서, 급하게 헤어져야 했던 게 참 아쉽다.

* 할아버지의 번호와 성함을 당시 스마트폰 메모장에 기록했었는데, 여행을 다녀온 후에 제대로 고장이 나서 2023년인 지금까지도 방법을 찾지 못해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올해로 여든이 되셨을 할아버지의 5년 전 여행은 어떠셨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또 다시 지구별 어딘가에서 여행자로 인사드릴 수 있기를 깊이 바랍니다.


그 아저씨가 혹시라도 나를 쫓아와서는 밖에 서 있을까 살피며 조용히 역을 나왔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지만, 후드를 뒤집어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숙소까지 뛰듯 걸어가고 있는 나를 보며 거리의 술 취한 러시아인들이 ‘꼬맹이!’하고 소리치며 마구 웃었다.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엄청 무서웠다(지금은 알아들은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함). 유독 짙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첫 번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시작부터 이렇게 스펙타클하다니, 앞으로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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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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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버지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자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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