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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Aug 23. 2024

꿈속에서 종종 가는 그 길

내가 좋아하던 길

 내 발길이 닿는 어귀마다 여러 모양의 길이 있었다. 나는 그 길의 높이와 곡선, 푹신푹신한 느낌과 숨죽이던 가쁜 순간들까지도 기억한다.

밤길은 유난히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 오싹하고 짜릿한 어두운 밤길을 달음박질하여 헐떡이며 대문에 들어서던 그 안도의 순간.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안전한 한숨을 몰아쉬던 그 순간을 사랑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이던 마을 길에는 다행스럽게도 가로등이 군데군데 서서 지켜주고 있었다.


내가 밤에 마실 가서 놀던 곳은 기껏해야 승희네 아니면 은숙이네 집이었다. 방학 때가 되면 저녁을 먹고는 종종 그들의 안채 안방 옆 오른편으로 튀어나와 길쭉하게 자리한 작은방을 향했다. 나를 맞이하는 친구의 대답과 함께 나는 얼른 뚤방에 올라 신발을 벗어던지고 마루에 발을 살짝 딛고는 얼른 작은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곤 했다. 나의 귀가가 늦어지면 어김없이 엄마가 쫓아오는 날도 있었지만, 야단맞기 싫어서 일찍 나온다고 해도 밤길은 내게 너무 무서웠다.  


"나 집에 데려다줘."

"알았어."


친구인 은숙이는 왠지 더 용감해 보였는지 나는 무섭다고 떼를 쓰기 일쑤였다. 어리지만 어른스럽고 마음이 넓었던 은숙이는 신발을 신고 우리 집 대문까지 배웅을 해줬는데, 내가 다시 은숙이네 집까지 배웅해 주기를 서로 반복했다. 급기야 줄곧 승희네 대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요이 땅!"을 외치며 숨도 쉬지 않고 집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우리 집과 은숙이네 집 사이  정확히 중간 즈음이 승희네 집이었다. 그곳은 각자의 집을 향해 반대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서로 거의 비슷한 시각에 도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승희네 대문에서 우리 집까지는 직선 길이었다. 어린 소녀들이 무슨 얘기를 그리도 많이 나눴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에이스 크래커 몸뚱이 중앙을 열고는 양쪽에 남겨진 마지막 한 조각까지 야금야금 먹어 치우던 그 고소한 추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당시 일본에서 수입된 삼색 색연필을 아끼고  아끼며 예쁜 손글씨를 쓰고 색을 칠하며, 작고 작은 꽃잎과 나뭇잎을 그려 넣던 수채화 같은 그날의 풍경을 기억한다. 집에 갈 시간임을 알려주던 은진이 언니의 목소리에 커다란 흙마당으로 나오면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며 쏟아져 내렸다. 한참을 서서 별을 보다가 마침내 대문을 나서면 어둠의 공포가 밀려왔다.


"내가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여기 서 있어야 해. 알았지? 꼭!"

"응, 알았어. 어서 가."


곧바로 2~300미터쯤 되는 콘크리트 직선길을 달음박질하여 우리 집 대문 앞에 도착하면, 고요한 밤중에 작지만 큰 소리로 소곤소곤 외쳤다.


"다 왔어. 들어가."

"응. 잘 자."


아득하게 들려오는 대답소리와 함께 나는 얼른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중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나는 어두운 길이 무섭다. 다시 과연 그 길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던 곳,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을 길이 몇 군데 있다. 그중에 하나는 대나무가 울창하여 터널을 이루고 있는 성적골 진옥이네 앞 길이다. 왼쪽으로 울창한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던 그곳은 길게 쭉쭉 뻗은 대나무가 만든 둥근 터널을 지나갈 때는 포근한 엄마의 품에 폭 안기는 느낌이었다. 바닥은 노란 황톳길이라서 보드라웠다. 그 길은 살짝 곡선으로 굽어져 있었고, 꽤 긴 편이었다. 놀이터처럼 술래잡기와 잡기 놀이를 하면 재미난 곳이었다. 길가 오른편에는 어릴 적 친했던 승님이가 살던 광식이 오빠 집도 있었다.


또 다른 길, 나는 대나무 터널을 지나 왼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의 언덕 위로 넓은 마당이 있고, 감나무가 크게 솟아 있던 재봉이네 집 앞 계단 길이 좋았다.  돌과 흙이 섞여있던 계단은 나선형을 그리며 마치 큰 호텔 로비 중앙에 있음 직한 멋지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꿈속에서 그곳을 꽤 여러 차례 거닐곤 했다. 깊숙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평평한 길 옆으로는 작은 개울이 흘렀다. 내 상상 속에서는 재봉이와 순례언니 집 뒷마당에서 작은 폭포가 개울로 떨어져 내렸다.  실제로 폭포가 있었는지 지금도 재봉이 엄마가 살고 계시는 그곳 풍경을 들어보고 싶다.


졸졸 흐르는 개울을 따라 아랫길을 쭉 내려오면 경숙이네 집 앞 빨래터가 있었다. 오래된 그 빨래터에 친구들과 괜히 놀러 가곤 했다. 힘차게 내려오는 개울 물줄기는 맑고 깨끗했고, 그 물소리도 무척이나  경쾌했다.  


그곳은 동네에서 가장 깊은 계곡의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반지의 제왕에 호빗들이 살법한 마법의 집들이 있는 마법사가 한 명쯤은 살아야 마땅할 것만 같은 동화 속 풍경을 상기시켰다.  나는 실제로 그곳에 가면 동화책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특히 개울을 건너 위쪽 마을 너렝이로 올라가도록 통나무 다리가 놓여있었다. 작은 통나무 다리가 있는 그곳에 도착하면 한여름날의 더위가 도망치다시피 달아나버렸다.  시원한 공기가 감도는 진정한 피서지가 따로 없었다.

왠지 그곳도 내 꿈속에서 종종 등장한다.  내겐 신비한 그 깊은 계곡의 통나무 다리를 건너면 가파른 높은 언덕길을 올라야 했다. 어린 내게 그 길은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높고 높게 느껴졌다.  마치 등산을 한 것처럼 언덕을 오르면 마침내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너렝이가 펼쳐졌다.  언덕 위 윗 몰 입구에는 소나무가 드높이 서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었다.


그 길은 뒤로 성적골로 연결되는 대나무숲 터널길과 이어져 전체 동네를 하나의 큰 원을 그리면서 에워쌌다. 너렝이 언덕 사이로 널찍하게 길이 나 있었고, 그곳에서는 멀리 기찻길과 교룡산성이 탁 트인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도 내 꿈속에 단골로 나오던 장소다. 나는 꿈속에서 그 길을 걷기도 하고, 차를 타고 지나가기도 했다. 내 꿈속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 나를 인도했다.


돌아보니 나는 아랫몰, 아래쪽 동네 입구에 살아서 그나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멀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다. 그때는 몰랐는데, 웃몰에 살던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 동생들까지 더 많이 힘들고 고단한 등하굣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도 내 꿈속에서 나를 데리고 가는 그 옛날 그 시절 그 길을 그리워하며 생각한다. 지금은 아마도 많이 변하여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없을지 모르겠다.

꿈속에서나마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다시 가볼 수 있으니 감사하다. 아무래도 나는 어린 추억 속 그 길을 많이 좋아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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