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손손 선조들이 일구어 놓은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
어린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 부모님과 경상도 출신 할머니가 다른 지방으로 옮겨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단 했을지를.
훗날 장성해서야 부모님을 통해 토막토막 전해 들은 이야기들은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내 어린 시절의 어두운 면을 직면했다. 특히 할머니는 완전 경상도사투리와 억양으로 그 정체성을 확연하게 드러내 보이셨으니 누가 봐도 확실한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와 삼촌의 말소리는 당연히 할머니와 닮아 있었으니 엄마를 뺀 우리 가족은 이방인의 신분이었다. 그 모습 그대로 다른 색의 옷을 입은 채로 당시 집성촌으로 오래오래 대를 이어온 강성 있는 마을 중앙으로 이사를 들어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부모님의 용기가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어 입이 벌어지곤 한다.
당시만 해도 마을에 젊은 청년들이 꽤 많이 있었으니 혈기왕성한 어른들 사이에 말씨가 다르다며 시비가 붙어 곤란에 처할 때도 있었다 한다. 모두가 친척으로 연결되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그 모든 낯섦을 견디어 내셨던 모든 용기와 도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정이네와 성준이, 정인이 언니네는 양 씨 친척들로 큰집 작은 집이었다. 웃몰 너래이로 올라가면 오른쪽 맨 꼭대기 마을에 대문이 열린 채로 커다란 마당이 들여다보이는 집, 중정의 작은 꽃밭과 우물이 놓인 새하얀 흙으로 단단하고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는 마당을 중앙에 두고 있는 집. 유난히 뚤방이 높은 기와집 안채와 아래채가 사각형을 이루어 포근히 감싸고 있던 내 친구 진옥이 집도 양 씨 성을 가진 친척들의 첫 번째 집이었다. 그 뒤를 따라 은정이 언니집도 양 씨였다. 당시 수원에서 농협에 근무하던 우리 둘째 고모의 아들, 그러니까 사촌 오빠와 중매로 연결을 해줬다가 성서가 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 위 마지막 집은 내 친구 길영이 집이었다. 양 씨 친척들은 마을의 처음과 끝을 지켜주며 보호자 역할을 한 셈이다.
무엇보다 마을에서 가장 수가 많고 친척들이 많은 가장 큰 성 씨로 소 씨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소 씨 성은 희귀성으로 내 친구의 대부분이 소 씨일 정도였는데, 소 씨 성의 친구가 많다는 사실에 은근 우쭐해지곤 했다. 그건 무슨 근거였을까? 후에 우리 막내이모가 우리 마을 어르신댁의 장남과 결혼하여 이모부도 소 씨라 사촌 동생들도 모두 소 씨다. 옥이모가 결혼하는 바람에 소 씨 성 집안을 사돈을 맞이하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성장한 후에 소지섭이랑 배우가 텔레비전에 등장했을 땐 세상 다른 곳에도 소 씨 성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장 씨 성을 가진 집안도 꽤 많았다. 웃몰 너래이 왼쪽으로 장 씨 종갓집을 비롯해 집안 친척들이 이웃하며 윗집 아랫집, 옆집으로 모여 있었다. 친구 지영이는 장 씨였지만 우리 집 근처 아래마을에 살았다. 지영이 부모님은 같은 마을에서 장 씨 아버지와 소 씨 엄마가 연애결혼을 하셨다. 우리와 어린 시절 함께 살던 삼촌도 장 씨 성의 작은 엄마와 결혼하셔서 우리는 장 씨와 사돈이 되었다. 작은 엄마의 막내 동생 규연이는 내 친구였다.
그 외에 경숙이와 인택이는 조 씨와 심 씨였다.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감선생님도 계셨는데 조 교감선생님도 동네 중앙의 초록색 기와지붕집에 살고 계셨다. 지금은 그곳에서 유일한 목사님이 되신 갑동 오빠는 이 씨였고, 소 씨 엄마와 김 씨 아버지가 결혼하셔서 김 씨 성을 가진 현영 언니도 있었다. 우리 윗집에 살던 순금 언니는 유일한 박 씨였다. 다른 성 씨가 있다면, 분명 소 씨와 연결되어 있었다. 서울 사시다가 시내에서 문방구를 하시던 큰 이모가 엄마를 따라 너래이로 올라가는 언덕 아래에 집을 사서 이사를 오시고는 큰 이모부 윤 씨가 하나 더해졌다. 사촌 동규오빠도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나는 잘생긴 오빠 덕분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오빠 없는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 존재 자체로 힘이 되었다.
그렇듯 각각의 성 씨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소 씨 성을 가진 친척들은 그 사이사이에 마치 퍼즐을 맞추어 예쁜 그림을 완성시키듯이 자리를 지켰다. 이가 빠진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교룡산성 아래 평지에 자리한 산성역 옆에는 이발소가 있었고, 내 친구 근모네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두 집 모두 소 씨 집안으로 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 우리 동네 그 마을 풍경을 좋아했다.
아무튼 정 씨 성은 그곳에서 우리 집이 유일했다. 그것도 교회를 엄청 열심히 다니고 교회 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하셨으니, 그야말로 이방인 중에서도 이방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잘 적응하고 견뎌내었던 거 같다. 내 친구들은 얼마나 다정했으며 따스했던가?
언니 오빠들은 얼마나 든든했던가?
친구들의 동생들은 모두 내 동생이었다.
어린 나는 울보였고, 말도 잘 못하며 극도로 낯을 가리는 소심한 아이였다.
누가 말을 걸기만 하면 울던 아이.
얼굴이 빨개져서 말 한마디 잘 못하던 아이.
수업 시간에 떨려서 일어나 제대로 책도 못 읽던 아이가 소중한 친구들과 소곤소곤 사귀며 대인관계를 배웠다.
그때 그 시절, 내가 그곳에 살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은 그곳을 떠나온 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방인으로 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아니 잘 살아냈다고 자부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소 씨 성과 장 씨 성은 우리의 사돈이 되어 우리의 가계가 혈연으로 이어져가고 있지 않은가? 그 시절 오랜 친구들이 내 곁에 머물고 있으니 그 또한 복이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노하우를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이국 땅에서 타민족으로 긴 세월을 살아냈으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결국에는 우리의 종착역을 향해 여행자로 가는 길이라면.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이해하는 마음을 더 소유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