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특강을 마치고 몇몇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던 시간에, 경상도 마산이 고향이신 정 박사님이 말씀을 이어가셨다. 하시는 말씀을 백 퍼센트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나와 부산 아가씨 은정 씨 밖에 없는 듯 보였다.
"사실 나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어요."
재선 씨가 옆에서 물어왔다. 서울 사람이라 서울말밖에는 모르는 남편에게 넌지시 무슨 말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역시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왔다.
나는 중간에서 통역 아닌 해석을 해주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어서 이런 것도 먹을 수 있다"라는 뜻이에요.
그제야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가 으쓱해졌다. 대한민국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제주도 방언을 모르는 나를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수긍을 하게 되었다.
머리를 요술봉이 살짝 탁 치고 지나간 듯, 내 뇌리에서 반짝하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모든 말을 다 이해하고 있었어. 경상도 말도 전라도 말도, 물론 서울말과 경기도 말까지도.'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한참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가?
우리 부모님은 결혼과 동시에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삼촌과 같이 생활하셨다. 당연히 세상에 태어난 우리 삼 남매는 함께 대가족을 이루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아이였을 때 일찍 돌아가셨지만, 삼촌은 우리와 유년 시절을 같이 보내시다가 장가를 가셨고, 할머니는 장수하셔서 우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같이 지내셨다.
내 어린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 집에서 세 사람은 경상도 말을 사용하셨다. 특히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계셨으니 토종 경상도 사투리를 평생 구사하셨고, 아버지와 삼촌은 경상도에서 태어나 우리가 함께 어린 성장기를 보냈던 전라북도 남원에서 내내 생활하실 때도 경상도 억양의 말투를 고수하셨다. 후에 경기도에 수십 년을 터를 잡고 사시면서도 여전히 경상도 억양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끈질긴 경상도 언어권에서 살아온 게 분명하다.
엄마는 전라남도 구레 출신이시니 당연히 경상도가 아닌 전라도 사투리를 쓰실 때가 많으셨다. 집 안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언어가 함께 공존하며 우리는 그 모든 말을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해외에서든 서울에서든 어느 지역 출신을 불문하고 아주 깊이 들어가는 지방 사투리도 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 어린 시절에 경상도 말을 쓰는 할머니와 아버지는 지역 사람들에게 텃새를 당하며, 때론 부당한 대우를 당하기도 하시지 않았겠는가? 나는 오래전이지만 몇몇 작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 얼마나 마음으로 고생하셨을지 이제는 내가 성인이 되어 조금은 더 그 상처를 보듬으며, 이해해 드릴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나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인도 델리에서 생활할 때 인도 사람들이 구사하는 그 많은 언어에 놀랄 때가 많았다. 보통은 두세 개의 언어를 알고 사용했다. 아버지의 고향, 어머니의 고향, 심지어 할머니의 고향, 할아버지의 고향의 언어가 달라서 한 집 안에 언어가 여러 개가 존재했다. 공용어인 힌디어와 영어는 또 배워야 하는 필수 언어인 만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에 때론 경외감마저 가지곤 했다. 그들의 언어 능력 또한 얼마나 뛰어나던지 부러운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살펴보니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나는 정말 경상도 말은 하나도 모르겠어. 카투사에서 처음 대구에 배정받았을 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도대체 알아듣지 못하겠더라고. 우리나라 말이 맞는가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 정말 심각했다고."
남편이 본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아주 옛날에는 나라가 서로 달랐는데, 언어가 다를 수밖에 없었겠죠."
말을 바꾸기는 세월이 흘러도 쉽지 않은 거 같다. 백 년이 수 십 번을 지나도 그 언어의 억양과 방언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언어는 문화라고 했고, 언어는 새로 계속 태어나고 성장한다고 했지만, 변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착된 그 어떤 불변하는 특징이 언어 속에 들어있다.
어찌 보면 다문화 다언어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나의 언어 감각이 발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주 긍정적이고 감사한 마음이 벅차오른다. 지나온 세월과 우리 가정만의 특별한 축복의 환경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수년에 걸친 해외 생활을 하면서, 영어만 사용해야 했던 영국에서도 완벽하지 않은 영어 실력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전화국이나 전기회사, 가스 회사, 은행 업무까지 전화로 따지고 항의하고, 요청하는 것을 해냈다는 것은 스스로 칭찬하고 싶다.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동양 여성이 영어로 무난하게 소통을 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고, 문화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하며, 구사되지 않은 무언어의 표현까지 포착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한 종합적인 산물이 언어라면, 그 복잡한 것을 더 쉽게 감지하고 이해하며,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다. 힌디어가 완벽하지 않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힌디어를 인도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다. 내가 하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했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 수정해 주며 바로잡아 주었다. 그렇게 나는 힌디어를 사용하며 인도 사람들과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완벽하지 않은 언어지만, 인도 어디를 가든 두렵지 않을 수 있었던, 내게 큰 힘이 되어준 선물 같은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천국에 가신 나의 김희님 할머니. 할머니의 목소리에 세뇌되었다. 나는 길을 가다가 귀에 익숙한 말소리가 들리면 발걸음을 멈춘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할머니의 찬양 소리와 경상도 억양과 사투리 섞인 그 우렁찬 목소리가 내게는 어찌 정겹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도 귓가에서 맴도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립고 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