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오랜만에 누나 집에 들렀을 때의 경험담이었다. 누나가 차려준 밥상을 먹는데, 어머니의 맛이 고스란히 그대로 느껴져서 밥상 앞에서 목이 메어 밥을 삼키기 어려웠다고.
어려서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는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두루치기를 해주시곤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갖가지 맛있는 반찬을 얼마나 맛있게 준비해 주셨던지, 나는 외할머니의 밥상을 그리워했다. 외할머니는 정갈하고 맛난 색색의 고운 음식들을 밥상 그득히 채우시곤 하셨다.
엄마랑 이모들은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를 그대로 전수받으신 거 같다. 외할머니의 밥상을 엄마와 이모들의 손길을 통해 다시 맛볼 때마다 대를 잇는 밥상의 가치를 확인하고는 한다.
해외생활에서 느끼는 향수와 울적함을 가눌 길이 없을 때마다 엄마의 밥상이 그리웠다.
'엄마가 차려주신 밥상에서 한 끼만 먹을 수 있다면...'
작은 소원이자, 희망사항으로 남곤 했다.
나는 그런 밥상을 차리는 일이 버겁다.
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아서 차려내 주셨던 엄마의 손길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옛 어른 들은 불편한 주방에서 어찌 그리도 맛깔나게 밥상을 잘 차리셨는지 존경심마저 든다. 존경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과연 나는 엄마의 밥상을, 외할머니의 밥상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그 맛을 이어가고 싶다. 우리 아이는 엄마의 음식, 엄마의 밥상을 그리워할까?
나는 식당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 입에 딱 맞는 밥상을 식당에서 찾기가 어렵다. 얼마 전 남편과 외식을 하며, 바깥에서 식사하는 걸 후회하며 말했다.
"나는 내가 집에서 요리한 음식이 제일 맛있는 거 같아. 귀찮아서 그렇지..."
그런 내 말에 남편이 웃었다.
밥상에 더 진심을 더하고 싶다. 우리 외할머니의 밥상처럼, 우리 엄마와 이모들의 밥상처럼 나도 주욱 이어갔으면 좋겠다. 나아가 우리 딸에게도 그 소중한 밥상을 이어 줄 수 있기를...
지난 크리스마스 날에 여동생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가족들을 초대했다. 식당에서 먹지 않고 집에서 직접 준비한 사랑 가득한 밥상에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고마웠다. 정성껏 장을 보고, 10인분의 음식을 보기에도 먹음직하게 밥상을 차린 여동생과 제부에게 감동을 잔뜩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여동생 또한 엄마의 밥상을 물려받아 지킬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될 거라는 희망이 내 마음을 더없이 기쁘게 했다.
여동생이 차린 크리스마스 밥상
우리 집 밥상을 위해 조금 더 정성을 다해보련다.
귀찮을 때도, 몸이 힘들 때가 있더라도 밥상을 조금만 더 귀한 마음으로 준비해 보기로 마음에 결심 하나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