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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Oct 24. 2024

상상

꿈꾸는 행복

얼굴이 환해졌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고, 경직된 얼굴의 근육들이 춤을 춘다. 빛이 난다. 세상이 환하고 밝아진다. 몸은 솜털처럼 가볍고, 마음은 둥실 떠올라 하늘로 향한다.

머릿속에 떠오른 작은 상상이 순식간에 만들어낸 변화다.


딸아이를 픽업하러 나가는 길에 잠시 시내 단골 정육점에 들렀다.

여기서 시내라는 것은 면 소재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상가들이 집결된 곳이다. 면사무소 옆에 주민센터, 그 앞에 다이소, 맘스 터치, 대신 화물, 다시 뒤로 건너오면 음식점과 작은 가게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읍내 공용 주차장이 있다. 바로 옆에는 하나로 마트, 그 위층에는 치과가 있고, 맞은편에는 농협과 철물점이 몇 개 붙어 있다. 옆으로 온갖 식물의 모종을 파는 종묘 상회와 피자 스쿨, 외국인들을 위한 아시아 실롱 마트가 있고, 같은 상가 단지에는 얼마 전에 새로운 치과가 들어섰다.  

큰 길가 대로변에 축협과 편의점, 그리고 롯데리아와 파리바게뜨가 있으니 여기는 도시라고 해야겠다. 이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병원 두 개, 한인의원과 기독의원이 있고, 각각 백암 약국과 하나로 약국과 같이 하고 있다. 한일의원 주차장에는 늘 강아지 한 마리가 배회하고 있다. 유기견이지만 한일의원 원장님이 옷도 챙겨주시고, 집도 제공하고, 겨울엔 집에 핫팩도 깔아주신다. 오고 가는 환자들에게 친숙한 강아지 봄이다. 큰 사거리 모퉁이에는 한의원이 자리하고 있고, 동물 약품과 페인트 가게, 천막 가게가 줄지어 있다.

다시 하나로 마트로 돌아오면, 바로 옆에 파출소가 있고, 그 옆에 작은 꽃집도 있고, 세탁소와 떡집도 있다. 백암에는 떡집이 세 개나 있다. 백암 동물 병원 근처에 하나, 신협 앞에 하나, 서울 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백암 약국 옆에도 하나 있다. 병원이 두 개인데 떡집이 세 개인 것은 참 재미나다. 농협 뒤쪽에는 우체국이 있다. 그 옆에는 옷 가게와 안경점이 있고, 가끔 고기가 필요할 때 들르는 정육점이 자리하고 있다.

올해는 백다방도 들어오고, BHC 통닭집도 들어왔다. 신협 옆에는 맛있는 중국집도 있다.  읍내 안에는 김밥 집도 하나 있고, 떡볶이를 파는 작은 가게도 있다. 무엇보다 인기 있는 백암 순댓국집 제일 식당과 풍성 식당에는 늘 멀리서 오신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걸 지나가며 종종 보곤 했다.


청미천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딸아이 학교 앞에 디포 문구점과 알파 문구가 우뚝 서있다. 맞은편에는 마라탕 식당도 있는데, 아직 그곳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붙어있다. 앞 동에 있는 고등학교 건물을 통과하거나 은행나무가 길게 늘어선 뒷길로 올라가면 중학교 건물이 있다. 오른쪽에는 체육관과 고등학교 기숙사와 아이들이 점심 급식을 먹는 식당이 있다. 학교가 오랜 역사가 있는 곳이다 보니 곳곳에 아름드리나무와 꽃들이 가득한 정원이 잘 관리되어 있으며, 늘 정원을 관리하시는 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신다. 봄이 되면 교정의 꽃들이 미소 짓게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엔 늘 고양이 두 마리, 짜장과 만두가 아이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즐긴다.


중고등학교 옆에 유일한 아파트를 하나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가 있다. 그 사거리에는 작은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놀곤 한다. 뒤쪽으로 학교 앞 골목으로 들어서면 미술학원 하나, 음악 학원 하나가 있으며, 영어학원도 하나 있고, 보습학원도 있다.  그 뒤 언덕에는 오래된 교회가 우뚝 솟아 있다.


이제 눈을 감아도 몇 발자국을 옮겨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손바닥을 보는 듯 훤히 다 보인다. 이 작은 시내를 좋아하게 되었다. 선택 장애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심플하면서도 단순한 시장은 삶을 간소하게 만들어 준다.


다시 정육점으로 돌아가 보자. 지난 김장 때 남은 맛있는 양념이 아까워서 수육을 해 먹으려던 참이었다. 암퇘지 앞다리 두 근에 14000원을 주고 샀다. 엄청 맛있을 거라는 사장님의 인사에 침을 꿀꺽 삼켰다. 비교적 저렴하고 신선한 정육점이라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다른 지인들에게도 소문내고 있는 참이다.

아무튼 문을 열고 나오는데, 낯익은 얼굴의 사나이 네 명이 길가에 서 있었다. 딱 봐도 인도 사람처럼 보였다.


"어디에서 왔어요?"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니, 한 사람이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힌디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사실 방글라데시와 인도는 오래전에 같은 나라였으니 언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더니 같이 힌디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어디서 배울 수 있느냐고 물어와서 북카페로 오라며 명함을 건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용하지 않던 힌디어를 구사하려니 문법이 틀리기도 했지만, 다시 힌디어로 말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는 걸려오는 딸아이의 전화를 받으며 서둘러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져야만 했다.

사실 시내에 나가면 외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여기가 어딘지 가끔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서 돌아와 북카페에 앉아 남편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머릿속에서 상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내일 전화해서 차로 데려와야겠어요."

"좋겠네."

"여기서 커피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면 너무 좋겠어요. 오늘 힌디어를 하려니까 자꾸 틀리더라고요."


북카페에 방글라데시 청년들과 토요일에 오기로 한 스리랑카 친구 차미 씨와 그녀의 친구들까지 북카페에 외국인들이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북적북적하며 각국에서 온 외국인 친구들이 이곳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테이블 곳곳에 앉아 수다를 떨며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미소가 꽃피운다. 눈이 커진다. 동공까지 넓어진다.


시내에 배회하고 방황하던 그들이 이곳에 와서 함께 마음을 나누고 의지할 수 있게 될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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