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롭지 않은 시골생활-원피스 입고 고추 따는 아낙

슬기로운 시골생활을 꿈꾸다

by 샨띠정

계속 내리던 비 때문에 빨래를 방에다 널기를 반복했다. 비가 그치기를 고대하며 기다렸는데, 드디어 오늘은 햇살이 비추는 아침을 맞이했다.

일어나자마자 세탁기를 돌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햇살을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빨래를 널고 나니 텃밭에 고추 생각이 떠올랐다. 요 며칠 비가 그치면 텃밭에서 붉게 익어가는 홍고추를 추수해서 말려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터였다. 오늘처럼 햇볕이 쨍쨍한 날이 적격이었다.


빨래를 널고 나자마자 홍고추를 담을 그릇을 꺼내다가 바로 집 뒤 텃밭으로 향했다. 초록빛 고추나무에 빨갛게 익은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게 어찌나 보기 좋은지 어서 따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지난봄에 그래도 텃밭에 고추를 조금 심어서 풋고추도 따먹고, 붉은 홍고추도 따서 말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추 모종 15개를 심었더니 고추가 주렁주렁 잘도 열렸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거름도 안 주고, 비료나 농약도 하나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방치하다시피 물만 주고, 틈나는 대로 살펴주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고추를 생산해 주었는지 사랑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오늘 수확한 홍고추

붉은 홍고추를 따다 보니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챘다. 과연 원피스를 입고 고추를 따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나밖에 없을 거야. 스스로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붉게 익은 홍고추만 다 따서 그릇에 담았다. 슬기롭지 못한 시골생활을 하고 있다. 원피스에 고추 따기라니.

고추 씻어 말리기

긴 장마 같은 빗 속에서 가지들이 쑥쑥 자랐고, 숨어 있는 오이도 찾아내 수확을 했다. 토마토와 방울토마토는 오늘도 우리의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다.

가지와 오이, 홍고추

나의 슬기롭지 못하고 안타까운 시골생활은 오늘 계속 이어졌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딸아이가 먼저 나가더니 갑자기 아이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나도 놀라서 급히 나가보니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장군이에게 '토순이와 오레오'의 존재를 비밀로 지켜내기는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장군이도 이들의 존재를 파악해버린 상태여서 딸아이와 혹여라도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요 며칠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장군이는 왜 토끼를 좋아해?"

"좋아한다는 게 사랑스럽게 느끼는 게 아니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의미야."

"걱정이야. 괜찮겠지?"

"그럼, 괜찮을 거야."


그렇게 안심을 시키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우리가 토끼집에 갔을 때는 이미 장군이가 토끼집 뒤쪽을 뜯어서 토순이를 꺼내 물고 난 후였다. 묶여있는 장군이가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목줄이 풀려버렸다. 그리고 장군이가 가장 먼저 간 곳은 역시 토순이가 살고 있는 토끼집이었던 것이다.


"엄마, 토순이가 죽었어..... 아악....!"

"오레오도 죽었어?"

"아니, 살았어."

"휴우.. 다행이다."


그렇게 장군이를 묶어놓고 다시 돌아가 오레오를 찾으니 아기 토끼 오레오도 그 사이에 도망치고 없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눈앞에서 집을 흔들어 뜯고, 토순이가 죽는 것을 목격했으니 그 어린 토끼 오레오가 얼마나 놀랐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찾아도 보이지 않는 오레오 때문에 딸아이는 또다시 통곡을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앞집에서 오레오가 앞집 마당에 왔다고 전화가 왔다. 달려가 보니 겁에 질린 오레오는 앞집 마당으로 도망쳐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다시 토끼장을 임시로 수리를 하고 오레오를 넣어주었는데 마음이 싸하다.


토순이와 의지하며 함께 지내던 오레오가 오늘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고는 혼자서 밤을 잘 보낼 수 았을지 걱정이다. 부디 씩씩하게 잘 자라길 바랄 뿐이다. 딸아이가 저녁에 말을 건넸다.


"엄마, 토순이가 오레오를 지켜주고 대신 죽은 거 같아."

"맞아, 그런 거 같아."

"오레오, 저리 비켜! 하면서 토순이가 지켜주다가 죽은 거 같아. "

"정말 그랬을 거 같아. 오레오가 살아서 정말 다행이다."


오늘 남편은 무덤 하나를 더 만들었다. 두 번째 토순이를 보냈다.

'삼가 고토순이의 명복을 빕니다.'


나는 언제쯤 슬기로운 시골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옆 집 어머니께서 장군이가 토순이 죽이는 걸 보시고, 나더러 개 훈련시키는 거 빵점이라 신다. 어서 장군이 처분하라고...

어르신 입장도 이해하지만, 어떡하라고.


딸아이와 함께 장군이를 어떻게 할까 의논을 했더니 딸이 말한다.


"엄마, 장군이도 모르고 그런 거니까. 우리 장군이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자."

"응, 알았어. 딸."


그러면서도 잠자리에 든 딸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물난다. 우리 토순이와 오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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