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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희 Oct 30. 2023

1/4짜리 인생

somewhere between everywhere

언제부터인가 한 물건을 사면 무조건 2,3개씩 bulk으로 사는 습관이 생겼다. 예를 들면 치실, 일회용 수세미, 캡슐세제, 바셀린 같은 것들이다. 1인 가구인데도 이렇게 물건을 여러 개 사두는 이유는 생활 범주가 해외 본가(이제는 거의 남의 집이 되긴 했지만), 한국 본가, 직장 관사, 그리고 가끔 파견 나가면 임시로 거주하게 되는 숙소, 총 4곳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냥 물건을 하나 사고 매번 들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니야?할 수 있는데 나는 OCD급의 완벽주의자가 아니어서 필요한 물건을 매번 가방에 챙기고, 또 풀고, 다시 챙기면서 그걸 또 안 잃어버리고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닐 다닐 자신이 없다. 차라리 여러 개를 사고 각 집마다 하나씩 두자 주의다(그마저도 각 집마다 나의 바람대로 완벽하게 세팅이 되지는 않지만.) 그냥 훌훌 빈 몸으로 유랑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이 몸으로 산지가 벌써 20년이 지나서 나만의 생활 패턴과 룰이 확고해졌고 그것들이 안 지켜지면 불만족스럽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이름을 말하서는 안 되는 자'는 본인의 영혼을 7등분하여 각각의 호르쿡스(마법템)에 담아 영생을 꾀한다. 그로써 그는 죽음과 삶, 그 경계에서 어정쩡하게, 얼굴의 형태가 뭉그러진 채로 존재한다. 여러 곳에 퍼져 있는 내 물건들이, 4등분된 내 인생이, 한 곳에 진득이 못 있는 팔자가, 너무 멀리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뭔가 이도저도 아닌 내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피엔스'(그 유명한 책)에서 개인이 느끼는 그룹 소속감의 여부는 실제 몸의 건강을 좌지우지할만큼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현대 사회인들이 과거에 비해 삶의 질은 높아졌지만 정신건강은 쇠퇴한 이유는 현대 사회는 자유와 개인 행복 추구라는 가치 실현을 위해 가족주의 사회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버려서라는 이유 등을 거론한다. 최근에 건강이 안 좋아져 본가에 올라왔는데 물론 동생이 집안일과 밥을 해준 것도 도움이 됐지만 평소에 편하게 안을 사람이 있다는 게, 집에 사람의 온기가 돈다는 게 정신건강에 이렇게나 도움이 된다는 걸 새삼 느끼고 내가 나의 자아실현을 위해 버린 것들이, 그리고 앞으로도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이런 것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낯간지러운 말은 절대로 먼저 안 하는 확신의 T인 동생이 하룻밤은 자기 전에 "언니 언제 떠나? 그냥 나랑 계속 같이 살면 안 돼?"라고 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에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이 '엄마 출근 안 하면 안 돼?'라고 물으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이 들었다. 혈연이라는 것은 신기했다.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만 주고 싸우다가도 이런 순간들이 오면 몇 번이고 용서하게 되는 이상한 관계다. (그게 딱히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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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정착 생활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득 이전에 지인의 대학 졸업프로젝트 일부로 참여한 TCK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때 받은 마지막 질문이 미래에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그 때 대답이 '기회가 되면 내가 아예 경험해보지 못한 국가, 문화권, 아예 제 4,5의 나라에 가서 아기가 첫걸음 떼는 것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배우면서 살아보고 싶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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