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 해도 될까?
옆집 사람이 죽었단다.
요란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관에서 다시 일어나는 시체 같은 모습으로 깨어났다. 한 번에 열리지 않는 오래된 섀시 문을 억지로 밀었더니 쇠 끌리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경찰입니다.”
신분증이 없었다면 절대 경찰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찾아와 이것저것 캐물었다.
“... 혹시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습니까? 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거나... 낯선 사람을 봤다거나...”
내게 낯선 사람은 당신인데... 머릿속 혼잣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잘 넘겼다. 그렇지 않아도 건물 뒤에 숨어있는 데다가 각자의 허름한 집에 홀로 사는 젊고, 늙은 남자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옆집 사람과는 인사 몇 번 나눈 게 전부라 아는 바가 없다고, 경찰 같지 않은 경찰에게 고했다.
“아, 그렇습니까?”
경찰 같지 않은 경찰은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이고는 허름한 명함을 한 장 쥐여 주고 돌아갔다. 남들 일할 때 쉬는 게 가장 달콤하다 했던가. 내 경우는 일이 없어 노는 거라 씁쓸하지만, 어쨌든 방해받은 단잠을 보충하러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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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복도식의 반지하에 달랑 두 개의 허름한 스테인리스 문이 있었고, 그마저도 건물 뒤편으로 돌아 들어와야 하는 고립된 공간이었다. 담장으로 막힌 복도의 안쪽에 있는 내 집으로 들어가려면 계단에 가까운 영감의 집 앞을 꼭 지나다녀야 했는데, 항상 반쯤 열려있는 영감 집의 창문에선 지독한 쓰레기 냄새와 티브이의 소음이 흘러넘쳤다.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내부 상태를 상상할 수 있는 집이었다.
“어이구! 새로 이사 오셨나 보네. 이야~ 책이 엄청 많구먼!”
처음 이사를 오던 날. 비지땀을 흘리며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세간과 그에 비해 넘쳐나는 책들을 혼자 나르고 있었다. 반바지인지 속옷인지 모를 체크무늬 바지에 연두색 기능성 반소매를 입은 허름한 영감이 계단에 쌓여있던 책을 집어 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소싯적엔 말이야. 나도 글깨나 보고 다녔는데 말이지... 가방끈만 조금 더 길었어도 폼 나게 살았을 텐데...”
영감은 묻지도 않는 학력을 읊조리며, 서점에 마실 나온 듯 아예 쭈그리고 자리를 잡았다. 차오른 숨을 다스리며 노려보는 내 시선을 뒤늦게 알아챈 영감은 머쓱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미소를 지었다. 삽시간에 얼굴에 퍼지는 주름이 오싹하게 보였다.
“나 옆에 사는 장가요!”
거뭇하고 주름진 손을 내민다. 검지의 손톱은 어디에 집혔는지 오그라든 모양으로 검게 멍이 들어있었다. 분명 내게 악수를 청하는 손이었지만, 도무지 잡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힘겹게 입꼬리를 움직여 겨우 웃는다는 모양을 만들고 나는 가볍게 묵례를 건넸다. 해가 더 지기 전에 짐을 넣어야 했기에 나는 계속해서 움직였고, 영감은 거절당한 손으로 자기 배를 몇 번 긁다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영감이 만졌던 책을 들어 옷소매로 문지르며 가급적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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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거리 하나 생겼는데, 하실래요??”
한창 글을 쓰느라 집중하고 있었는데 밤 10시가 넘어 일용 사무소장에게 전화가 왔다. 사실 이번 달은 일거리가 부족해서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일거리가 생기면 꼭 연락 좀 달라고 따로 사정을 한 참이었다.
“이게 좀... 거시기한 일이긴 한데...”
거시기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법이다.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무수한 부정을 가리기엔 더없이 정감 가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런 거시기한 일들은 수익이 더 나은 편이다. 굳이 드러내지 않더라도, 줄어든 일감에 절박한 상황이었던 나는, 거시기를 확인할 여유도 없이 넙죽 일감을 받아들였다. 마침 또 글이 잘 써지던 참이었는데... 아쉽지만 새벽에 나가려면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몽롱한 새벽길을 재촉하며 사무소로 향했다. 원색 시트지로 무성의하게 가려진 문을 여니 소장과 커피믹스를 나누던 핼쑥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 느릿하게 위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 갑시다.”
낯선 이를 바라보는 경계와 불안의 눈빛. 아마 나도 같은 표정이었으리라. 아무래도 오늘 십장인 것 같았다.
“일이 좀 더럽고 역해서 보통 일용은 잘 안 써요. 원래 하던 놈 하나가 잠수를 타는 바람에 급히 찾긴 했는데... 괜찮겠소?”
더럽고 역한 건 사람이지. 일이야 뭐...
“뭐, 오늘 하루만 고생 좀 합시다.”
조수석 문을 열며, 코를 찌르는 방향제 냄새에 인상을 구겼다. 어딘가 음침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이런 걸 챙기는 타입이었나? 미처 커피를 마시지 못한 내 욕구불만을 예상한 건지, 좌석 뒤에서 캔커피를 하나 꺼내 줬다.
“그냥 쓰레기만 치우면 되는데... 가서 할 일 설명해줄게. 거 마스크 하나 챙기고...”
글로브 박스 안에 정화통이 달린 요란한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장난감을 손에 쥔 어린아이처럼 마스크를 주물럭거리는데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지나온 길인데... 괜스레 두리번거릴수록 주변은 더욱 또렷해졌고, 이윽고 트럭이 멈춰 선 곳은 내가 사는 건물 앞이었다.
“다 왔구먼, 여 반지하 방 하나만 치우면 돼요.”
분명 내 방을 치우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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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한 번 봐주렵니까??”
매복하고 있던 사냥꾼처럼, 벌컥 튀어나온 영감이 내 앞을 막았다.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이 얼굴에 드러남을 느꼈지만, 영감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젊은 친구가 책도 많이 보는 거 같아서... 나도 심심풀이로 글 좀 깨작거리는 게 낙이거든. 근데 이거 뭐 보여줄 데가 있어야지!”
6년 전 연도가 각인된, 종이가 누렇게 바랜 낡은 사무용 노트를 쑥 내민다.
“이 나이 먹고 좀 주책이지만... 어쨌든 나보다 공부도 많이 하고 머리도 잘 돌아갈 건데, 이거 한번 보고 말 좀 해줘요. 욕해도 괜찮아!”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불쾌함과는 다르게, 낡은 노트는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에 쥐어졌다. 꽤 두툼한 노트였다. 옆으로 드러난 페이지의 꾸깃한 주름들이 어지간히 손때가 탄 물건임을 티 내고 있었다.
“아 거참... 쑥스럽네! 고마우이 젊은이!”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던 영감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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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의 안내로 섀시 문 앞에 이르렀다. 아마 마스크를 쓴 탓에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곁눈질 한 번으로 안쪽 내 집 문이 보인다.
“냄새가 안 빠져요. 냄새가... 윗집에서 하도 성화라... 정작 옆집은 아무 소리 안 하는데... 아무튼, 소문 안 나게 잘 좀 부탁할게요. 아휴! 집값 떨어지게...”
파자마 차림으로 머리에 롤을 감은 건물주는 한껏 코를 움켜쥐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십장과 나는, 치명적 바이러스의 현장을 검증하는 사람들처럼 일체형의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어차피 하루 만에 안 끝나. 들어가면 일단 분리수거부터 해요.”
키를 돌려 문을 여는데 마치 오래된 유적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는, 고대의 비밀이 담긴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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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재료를 마구 넣은.. 굳이 말하자면 덮밥 같은 것을 입에 욱여넣었다. 눈앞에는 낡은 노트북과 고작 세 줄 정도 타이핑된 문서 프로그램이 켜져 있다. 좀처럼 삼켜지지 않는 입안의 음식물을 규칙적으로 씹으며, 제자리에서 열심히 깜빡거리는 커서를 바라본다. 벽에 드리운 내 그림자가 여물을 되새기는 소처럼 느껴졌다.
도무지 써지질 않았다. 시간은 내가 인지하고 있는 길이를 속여 순식간에 지나갔고, 젓가락질은 잘만 하면서도 키보드 위에선 깁스라도 한 것 마냥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런 시간들이 처음은 아닌지라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았지만, 조용한 자책과 자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명치 언저리에 쌓였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모습일까. 정말 내게는 재능이 없는 걸까. 평생을 다 바쳐도, 지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쓸모없는 놈.
차라리 자책하는 소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면 이보다는 많이 썼을 텐데... 음식물을 끝내 삼키지 못하고 옆에 있던 과자봉지에 뱉어버렸다. 입을 헹구려 안쪽에 물방울이 맺힌 페트병을 집어 들었는데 담배꽁초가 떠다니는 시커먼 물이다. 일전에 무심결에 들이켜 본 적이 있는지라 익히 아는 맛이었지만, 지난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정성스레 뚜껑을 잠그고 집어던질 자리로 시선을 돌리다 아까 팽개쳐 둔 영감의 낡은 노트가 눈에 포착됐다. 어쨌든 감당하기 힘들 만큼 속에 쌓인 자기 비하를 희석시켜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잘 쓴 글씨는 분명 아니었지만 알아보는 데 문제는 없었다. 옛날식 맞춤법에서 머무른 몇몇 단어는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허무맹랑한 상상력이 더해진 소설 같은 글과 에세이처럼 감상을 적은 글. 그 외 일기나 노랫말 같은 짤막한 글까지 꽤 많은 글이 적혀있었다. 페이지를 아끼려고 했던 걸까. 마무리가 된 글 뒤에도 한 줄의 낭비 없이 볼펜으로 착실하게 칸을 메꿔 글을 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특징들을 다 파악하기까지, 어느샌가 중반을 넘어 정신없이 읽을 만큼 글이 재미있었다. 울리고, 웃기고, 공감할 수 있는 글들이 꼬리를 물었다. 기술적으로는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조금씩만 손을 본다면 시중에 홍보하는 변변찮은 책들보다는 훨씬 파급력이 있을 법했다. 노트를 집어 든 자리에서 넘쳐흐르는 글을 눈으로 꿀꺽꿀꺽 마셨다. 입을 헹구는 일 따윈 싹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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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서 본 듯한 페트병이나 쓰레기들은 검은 봉투로, 그 외 구분이 애매한 것들은 마대 자루에 담았다. 낮은 키의 서랍장과 지퍼로 여닫는 옷장 같은 것들은 그 자리에서 적당한 크기로 부숴야 했다. 반지하가 대개 그렇듯 넓지 않은 공간에 얼마 되지 않는 집기였음에도, 방호복과 마스크로 온몸을 두른 터라 물주머니처럼 온몸에 땀이 가득 뱄다.
“그쪽은 가지 마시고!!!”
집 안쪽으로 쪽문이 나 있는 자리에 보일러가 들어간 창고 같은 공간이 있다. 나는 그곳에 쓰지 않는 잡동사니나 공구 상자를 넣어두곤 했는데, 내 집과 똑같이 반으로 접어 찍은 데칼코마니 구조였기에 자연스레 향하던 걸음을 십장이 막아섰다.
“거... 이쪽은 좀 그렇고... 여긴 내일 다른 사람이랑 할 것이니 오늘은 요 앞에만 시마이 합시다.”
슬쩍 열린 쪽문 틈 사이로 시커먼 얼룩 같은 게 묻은 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내가 봤던 것과 동류일 거라 짐작되는 노트가 몇 권 쌓여있었다. 저만큼이나 많이 썼던가. 아마 영감이 살아있었다면, 그 뒤로 저 노트들도 다 볼 수 있었겠지. 가슴 언저리에 무언가 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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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는 뭐... 학교 다니는 게 벼슬이었지...”
막걸리를 두어 병 마시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영감은 오랜만에 말동무가 있어 신이 났는지 입가에 웃음이 걸려있었다. 노트를 돌려주며 묻고 싶은 게 많았던지라 막걸리와 간식을 사 들고 옆집 문을 두드린 참이었다.
“그저 뼈 빠지게 일하는 것밖에 몰랐어. 그래도 우리 때는 열심히 산다 치면 집도 사고 장가도 가고 했으니까... 그 덕에 나도 마누라 얻고, 자식 놈도 둘 있고... 그놈이 자네만 하려나? 못 본 지가 오래라 잘 모르겠구먼.”
IMF를 기점으로 영감님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듯했다. 이런저런 시도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사고로 부인도 잃고 난 후에는 자식들과도 내통이 없다고 했다. 처지를 비관하여 난폭해진 자신의 잘못이라며 노인은 막걸리를 들이켰다.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어. 자식들 보기도 미안해서... 그냥 하루 벌어 풀칠하면서 심심풀이로 몇 자 적어둔 게야. 쓰다 보니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고. 내가 대학은 고사하고 고등학교 문턱도 못 가본 놈인데... 아니 글쓰기에 취미가 붙을 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지.”
영감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누가 이 사람을 보고 이런 글을 썼을 거라 짐작이나 하겠는가. 언제부터 글을 쓴 걸까. 이것이 연륜이란 건가. 혹은 재능이란 건가. 만약 처음부터 제대로 글을 썼다면, 역사에 남을만한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노인은, 깡마른 몸에 떡 진 머리를 하고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막걸리를 마셨다.
“사는 게 참 괴로웠는데, 그래도 살아보니 알겠더라고... 똥 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살아 있으니 이렇게 젊은 친구한테 칭찬도 받고, 술을 다 얻어먹기도 하는구먼. 허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빛난다는 건 뭘까.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어딜 가든 낯선 이가 알아볼 만큼 인지도를 갖는 것이 빛나는 삶일까?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흔한 이런 공간에서도 심금을 울리는 멋진 글이 나온다는 건, 아직 빛을 내지 못했을 뿐 세상이 모르는 많은 재능이 숨어있다는 생각, 단지 나에게만 그 재능이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 내 눈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아무도 모르는, 허름한 주택가의 반지하 복도에서...
“내가 시간을 너무 뺏었구먼. 거 다음엔 자네 글자도 좀 보여줘 봐. 그때는 내가 거하게 상차림 한 번 할 터이니...”
영감님은 비닐봉지에 마구잡이로 쓰레기를 담고는 노트를 챙기고 가슴에 품었다.
내 글을 보여달라는 그 말이 명치 언저리를 쿡하고 찔렀다. 나는 보여줄 글이 없었다.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읽고 썼는데, 왜 보여주고 싶은 글이 없지? 나는 뭘 한 거지? 뭘 쓸 수 있지?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좋은 글이 뭐지? 평생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차라기 포기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왜 아직도 글을 쓰려는 거지? 정말 내가 쓸 수 있는 걸까?
영감의 노트에 적힌 글처럼 가슴에 와 닿던 게 없었다. 그저 아무도 찾지 않는, 자식도 돌아설 만큼 망가진 인생을 살아온 영감이, 심심풀이로 쓴 그 글이, 수많은 책을 독파하고 밤새 모니터 앞에서 깨어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비웃었다. 쌓아온 자괴와 자책의 무게가 한층 더 버거웠다. 지쳤다. 내 앞에서 빛나는 이 영감처럼, 나도 빛나고 싶었다.
손아귀에서 뻐근함이 느껴졌다. 가빠진 숨을 다스리는데, 영감이 피를 흘리며 창고 안에 쓰러져있는 모습이 펼쳐졌다. 언제 쥐었는지도 모르는 장도리와 영감의 품에 있던 노트를 들고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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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다 됐구먼! 마대 남은 거만 들고 나오시오.”
십장이 쓰레기봉투를 가득 들고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돌아 사라지는 십장의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노트들을 챙겨 조용히 내 방으로 옮겼다. 창 밖으로 트럭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사는 데가 어디요? 그 앞으로 내려다 줄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정중하게 인력소 앞에 내려달라 말하고는 트럭에 몸을 실었다. 인력소 앞에 도착해 벗어낸 방호복을 트럭에 싣는 동안, 십장이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두 장과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오늘 고생 많았소. 사우나라도 들렀다 가요. 아 그리고, 비위도 좋고 일도 잘하던데... 몇 번 더 할 생각 있어요?”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오늘 같은 일은 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집에는 더 들어갈 이유도 없었다. 십장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 이해한다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십장은 대체 뭘 이해한 걸까.
다른 날보다 이만 원을 더 받았다. 역시 거시기한 일은 수입이 괜찮은 편이다. 어쨌든 집에 도착하면, 잊지 말고 창고에 둔 장도리를 치워야겠다. 그리고 오늘도 좋은 글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