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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Mar 10. 2024

능숙하지만, 뜨거워지지 못한다

1부 버킷리스트

“국수 먹을 수 있는 거야?” 

회사 형들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했다. 수화기 너머 나긋한 여자 목소리.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정하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최근에 열심히 카톡을 했다. 가끔 웃는 모습도 보였다. 소개팅을 시작 8수 만에 드디어 애프터를 잡았다.


서른이 넘어 소개팅을 받았다. 소개팅이라 말했지만 맞선이었다. 나보다 4살 적거나 6살 많은 사람. 밥을 먹기에는 이르거나, 커피를 마시기에 늦은 시간에 만났다. 어색한 웃음과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곳은 전쟁의 포화 속이었다. 얼핏 들으면 칭찬 같았다. 하지만 듣고 나면 끈적이고 찝찝함이 남았다. 

“차가 고장이 안 나나 봐요?” 

“자동차를 잘 알아서 고쳐서 타요.” 

“고쳐서 타는 것보다 직원 할인받아서 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왜 안 사세요?”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머쓱함에 커피잔을 들었다. 속이 비치지 않는 검은색 아메리카노. 맞은편에 반사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이, 직업, 학력 상관없었다. 모두가 비슷했다. 어색한 미소를 띠며 물 밖에 서 있었다. 허리만 살짝 굽혀 내 속을 들여다봤다. 그때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


몇 번의 소개팅 이후 바뀌었다. 소개팅에 입고 나온 옷과 액세서리를 칭찬한다. 한정판이고 얼마나 힘들게 샀는지 이야기한다. 취미 생활을 물어본다. 암벽등반, 골프, 테니스라 말한다. 여행을 좋아하는지 최근에 어디를 다녀왔는지 물었다. 작년에 하와이 코타키나발루에 다녀왔다고 말한다. 친구가 많은지 물었다. 자신은 털털해서 동성 친구보다 남자인 친구가 더 많다고 말했다.

 ‘집안이 얼마나 잘 사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인생 진짜 재미있게 살았네? 모은 돈 하나도 없겠다.’

 돗자리 펴고 점집을 차릴까? 생각이 들었다. 소개팅 횟수 7번. 일한 기간 평균 7년. 모은 돈 삼천만 원. 어디서 교육받고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전 시급 3,800원 받으며 고깃집 불판을 닦았다. 그때도 10만 원씩 주택청약을 넣었다.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남는 돈이야?’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차게 식었다.


취향에 맞춰 두 가지 선택지를 보여줬다. 예상처럼 모던한 인테리어의 두 번째 레스토랑을 선택했다. 밥 먹고 나와서 전시전을 보고,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를 가야지 생각했다. 그녀는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밥 먹기에 조금 이른 시간. 11시에 보기로 했다.


양이 적다는 후기가 많았다. 2인 세트에 사이드를 추가하기로 생각했다. 12시가 되어 도착했다. 직원은 난방기가 고장 나 추울 수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따뜻한 토마토수프를 추가 주문했다.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음식이 나왔다. 그녀는 작은 탄성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먼저 음식을 덜어주고 내 것을 담았다. 식사 후에 관람한 실내 전시전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발걸음을 카페로 옮겼다. 

“여기 시그니처는 딸기 수플레랑 아인슈페너예요” 

처음이었지만 와본 것처럼 말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그런데 조금 춥네요. 손 시려요.”

 두 손을 모아 입김을 불었다. 그 위에 손을 포개며 말했다.

 “제 손 따뜻해요.” 

가늘고 하얗던 손이 느껴졌다. 피부가 참 얇고 부드러웠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두릅 순처럼 여리게 느껴졌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여동생 손을 잡으면 이런 느낌일까?’ 

동성 친구 손을 잡아도 이것보단 기분이 나을 것 같았다.


불편한 골짜기 같았다. 레스토랑은 아주 맛있었다. 그런데 조금 짰다. 카드를 건네며

 “여기 정말 맛있어요.” 

인사했지만 사실 비싼 것 같았다. 두 번 올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티키타카가 잘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다. 맞은편에서 물개처럼 손뼉을 쳤다. 가끔

 “와! 진짜요? 정말요?” 

세 마디면 대화가 진행되었다. 내가 이야기할 때는 휴대전화기를 보거나 딴짓했다. 오롯이 자신이 말할 때 웃는 사람이었다. 카카오톡 숫자 1이 반나절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필이 예쁜 카페로 바뀌었다. 오늘도 일찍 만나서 밥을 먹고 전시전을 보고 헤어진 일정. 나와 이야기하며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애써 마주하지 않았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PICK ME PICK ME”을 외쳤을 거다. 하지만 손을 잡고 알았다. 그 정도로 간절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게 아까웠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의문이 들었다. 가슴이 뛰지 않았다. 데이트 코스를 짜고, 이야기하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쉬웠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정중하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서른이 되어서 시작하는 연애는 능숙할 수 있다. 하지만 쉽게 뜨거워지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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