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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11. 2024

All station stand-by

배가 앞으로 나아갈 조건

과거에나 지금이나 선박, 배, 즉 바닷물에 뜨는 철 덩어리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 번째. 가고자 하는 곳의 목적과 이유
두 번째. 추진력을 얻을 수단
세 번째. 위 모든 것에 힘을 주는 에너지


가고자 하는 곳을 정하는 건 항해사고, 추진력을 얻을 수단을 다루는 건 기관사다.

항해사들은 배의 가장 위 조타실에서 갈 곳을 향해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준비하고, 명령을 내린다.

기관사는 수 만 톤에 달하는 화물과 배를 움직이기 위한 무식하게 큰 엔진을 배의 가장 밑에서(수면하에서)

운용하고 선박 전체에 전기를 공급할 발전기를 운용한다.


항해사는 뇌, 엔진은 팔다리, 그리고 모든 것에 에너지를 주는 발전기는 심장


위 세 가지 조건이 맞아졌을 때 선박은 비로소 출항준비를 완료하게 되고 누구에게도 도움받을 수 없는 망망대해 바다로 한 몸이 되어 떠난다. 그곳에는 무언가 망가졌을 때 바로 부를 수 있는 보험사 직원도, 대신 끌어다 줄 렉카도, 근처에서 금방 기름을 떠 올 수 있는 주유소도, 펑크 난 부분을 금방 때워줄 수 있는 타이어집도, 심지어 밥을 제공할 식당도 전혀 없다. 그저 아무렇지 않다가 느닷없이 미친놈처럼 몰아칠지 모르는 바다 날씨와 언제 눈치 없이 망가져 버릴지 모르는 수 천 개의 장비들이 있을 뿐이다.


배는 밧줄을 풀고 항구를 나서는 순간 바다 위에서 모든 걸 자급자족 해야 한다. 가장 하급사관인 3등 기관사가 바닷물을 수로 만드는 조수기를 잘 못 운용하면 소금물로 만든 밥을 먹고 항해 내내 굵은소금가루가 빨래든, 엔진이, 갑판 곳곳에 끼어있을 거고 공조냉동시스템을 망가뜨리면 종일 햇볕에 달궈진 철판으로 만든 방 안에서 선원들은 통구이가 되어 익어가거나 다 녹은 냉동식품 때문에 식중독에 걸릴 수도 있다. 그만큼 다른 사관들이나 부원들의 임무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2017.FEB.21st. 0200 DEPARTURE TO KOREA.

돌아와서, 우리 배는 방글라데시에서 곡물을 잔뜩 싣고 인도의 첸나이, 콜카타에 운송 업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콧수염쟁이 상인들에게 식재료와 부식들을 공급받고 잡상인들과 콜라 흥정을 하는 등 시시콜콜한 준비를 거쳐, 울산항을 목적지로 항해계획과 감항성(선박이 계획된 항해를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유류, 식량, 청수, 기기상태 전반을 점검했다.

실습기관사로 한 달여간 승선한 바 느낀 점은, 시스템과 조직이 주는 힘과 책임감이다.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 각자 조타실과 갑판, 기관실에서 주어진 역할을 각자의 책임감과 협업으로 결국 해낼 때 이 거대한 철선은 물을 가르고 원하는 곳으로 뱃머리를 돌릴 수 있다.


산에 오르는 결심은 신발을 신으면 절반이 해결된다는 말처럼 모든 일은 시작이 중요하듯이 배도 출발이 중요하다. 출항시간이 정해지면, 항상 네 시간 전에 모든 기계를 예열하고 이상이 없는지 검사한 다음 연안관제소와 세관 등 당국의 모든 검사가 끝나면 출항 30분 전에 선내 전체에 누구나 듣도록 크게 방송이 울린다.


All station standby, All station standby,




이 방송이 울려 퍼지면 각자 위치를 잡고 부두에 묶여있던 밧줄을 풀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게 된다.


준비됐다는 저 말이 참 좋다. 내가 무언가 시작하기 전에 다급히 우왕좌왕하지 않고 미리 차분히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두었다는 건 어떤 일이든 무슨 일이 발생하던 좋은 방향으로 해낼 수 있게 해 줄 것만 같다.

그리고 반대로 누군가 나와 함께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다.

이제 배를 타지 않지만 똑같이 적용해서 내가 하는 어떤 일에도, 인간관계에도 "준비됐다"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이유를 설정하는 것도, 그러기 위해 추진력을 발생시키는 힘도,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일도 너무 중요해서 하나라도 잃는다면 항해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얼마 전 좋은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이것도 항해를 안전하게 성공시킬 조건들과 맞는 게 아닐까. 세 가지 퍼즐이 준비되어 있다면 항해 중에 크고 작은 트러블이 생기더라도 적절하게 가공하고 맞춰서 키를 바로잡아 갈 수 있을 거다.


그날 우리는 평소처럼 배가 나아갈 조건들을 충실히 갖추고 인도에서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뱃머리를 고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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