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살 Nov 16. 2023

안티브라자

브라자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

어렸을 때 나는 멋진 커리어 우먼들이 자기 손으로 예쁜 속옷을 고르고, 사 모으는 장면을 자주 상상했다. 빨주노초파남보 색색깔로 잘 개어 있는 속옷을 요일마다, 기분 따라 바꿔 입기도 한다. 색깔만 다양할 뿐 아니라 레이스가 달린 것부터 유명 브랜드 로고가 박힌 것까지 다채롭다. 그것들에서는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 냄새도 날 것이다.


어른의 속옷에 대한 낭만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무언가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됐다.

초등학생인 나는 못생긴 속옷만 입었다. 엄마가 집 앞 이마트에서 다섯 벌에 5000원 하는 청소년 속옷 세트를 사다 준 것을 너무 오래 입어 고무줄이 늘어나고, 색이 바랬다. 나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도, 보여지지 않는 것도 볼품없는 초등학생 여자아이였고, 어른이 되면 속옷부터 겉옷까지 모든 것이 깔끔하고 아름다운 어엿한 여성이 되어 있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까 속옷이 중요했다. 예쁘고, 다채로운 속옷을 챙겨 입는, 내면과 외면을 모두 가꾸는 어른이 되는 일.




어린 시절의 나에게 참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지금 일주일째 똑같은 브래지어를 하고 있다. 이것은 살구색의 민무늬 브래지어. 구글에 브래지어라고 검색하면 곧바로 화면에 뜨는 바로 그 전형적이고, 재미없는 브래지어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변명하자면,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불청결하고, 무심한 브래지어 생활을 영위할 생각이 없었다. 엄마가 사주는 속옷 말고, 나만의 속옷을 찾기 위해 탐색하고, 구매했고, 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비싼 것이나 저렴한 것이나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빅가슴 브래지어의 디자인이다. D컵 이상의 큰 가슴을 위한 브래지어는 왜 디자인이 촌스럽기만 할까. 잔잔한 프릴이 달린 브래지어도, 잔꽃무늬 브래지어도, 민무늬 핫핑크 브래지어도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저것은 적당한 가슴 크기의 여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내가 가진 브래지어 디자인은 대체로 펑퍼짐하고, 어정쩡하고, 할머니들 것 같았다.


사실 디자인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괜찮다. 몸이 편하기라도 했다면 나는 브래지어 유목민으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 크기를 정확하게 재고, 백화점에서 구매한 가격대 있는 브래지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은 입으면 소화가 안 됐고, 어떤 것은 달릴 때 가슴이 덜렁거려 불편했고, 어떤 것은 브래지어 끈이 너무 두꺼웠다.


나는 도저히 브래지어와 친해질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니플패치를 붙이고 브래지어 없이 생활해보려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커다란 가슴이 브래지어 안에 고정되지 않은 채 옷 속에서 이리저리 꿀렁거리는 바람에 일상생활 중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두세 배로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운명처럼 브래지어 하나를 만났다. 결국 백화점에서 7만 원짜리 살구색 민무늬 브래지어를 구매했다. 이 브래지어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1. 어깨끈은 얇을 것.
2. 무늬가 없을 것
3. 편안하게 맞을 것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던 이 브래지어를 찾기까지 나는 너무 긴 시간을 돌아왔고, 그래서 감격했다. 나는 이것을 입기로 정했다. 이것만 입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브래지어 따위에 신경을 끄기로 했다. 다 지겨웠다.


여름에는 똑같은 브래지어를 일주일 내내 입을 수 없었다. 돌려가며 입어야 했기 때문에 같은 디자인의 검은색 브래지어 하나를 더 구매했다. 할인 기간이 끝나서인지 브래지어 하나에 8만 원이었다. 하나를 더 구매할 엄두는 나지 않아서 현재는 두 개의 브래지어를 돌려가며 입는다.


내 브래지어 사정에 대해 가만히 듣고 있던 동거인이 일침을 날렸다.


그거 브래지어가 아니라 그냥 젖걸이 아냐?

나는 그녀의 말에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지금 내 브래지어는 속옷이라기보다는 기능성 젖걸이었다. 이 무겁고, 걸리적거리고, 축 처진 가슴을 보관하는 젖걸이.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이 브래지어를 내 몸에 꼬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무늬가 다양한 속옷, 색깔이 통통 튀는 속옷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저 가슴 없는 몸에 대한 욕심만 있다. 그래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그런 간편한 몸에 대한 갈망만이 남아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