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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언 Mar 17. 2020

호갱님 라이프

내가 얻은 건 신천지를 알아보는 눈

6살 나는 놀이터에 병아리를 안고 나갔다. 전날 길거리에서 산 조그맣고 보드라운 병아리. 삐약삐약 소리너무 예뻤다. 병아리가 떨어질세라 품에 꼭 안고 그네에 앉았다. 그런 나에게 멀리서 언니 두 명이 다가왔다. 초등학생 즈음된  처음 보는 언니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우리 숨바꼭질할래?”



혼자 놀고 있던 나는 흔쾌히 오케이 했다. 언니들이 나에게 술래를 하라고 한다. 내가 쭈뼛하자 자신들이 병아리를 데리고 있으면 더 잘 찾을 수 있을 것이란다. 그래! 라며 나는 병아리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눈을 감고 노래를 불렀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옷자락이 보인다~ 숨었니? 언니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딨니~? 못 찾겠다! 여러 번을 불러보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병아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몇 번 다시 불러보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언니들은 없었다. 병아리도 함께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소중한 병아리를 도둑맞았다. #에라이잘먹고잘살아라


어린 시절 유달리 기억나는 일 중 하나다. 병아리가 사라져서의 속상함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이 상황이 뭔가 싶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언니들이 병아리가 가지고 싶어서 나한테 거짓말을 했구나. 다행히 그건 이해했다.


호구 [명사]: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


요즘 호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호갱 당하다: 만만하고 속이기 쉬워 이용당하다 라는 뜻이다. 바둑 석 점을 놓고 한쪽만 트여있을 때, 상대방이 그 트인 자리에 돌을 놓게 되면 바로 잡아먹힌다. 덫에 빠진 것이다. 언니들은 술래잡기라는 덫을 놓았다. 나는 너무 순진하게 거기 발을 놓았다. 그렇다면 어린 나도 호구였던 걸까? 초등 언니들에게 호갱 당하는 유치원생이라니.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모르겠네.


난 참 착했다. 그냥 그렇게 타고났다. 원래 사람을 잘 믿었다. 그 사람이 나쁜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왜냐면 내가 그러니까. 사람들의 좋은 점을 위주로 보니까. 난 하나라도 배려하고 싶으니까. 혹시 이상한 상황에 놓여도, 설마 저 사람이 일부러 그랬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는 사람을 정말 잡았다.


남자도 잘 믿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좀 이상하다 싶으면 빨리 정리했어야 했다. 아니, 나감지하고 후다닥 정리했다. 그랬더니 매일 우리 집에 전화해서 협박을 하던 그. 불을 지르겠다, 오늘 가서 죽이겠다, 뒤통수 조심해라, 나중에 군대 가서 그 성질 못 이겨 죽도록 맞다 어디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 이 글을 볼까 봐 무섭지만 하여튼 그게 내 첫 번째 기억.


또 이상한 놈과 엮여서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된 경험. 헤어지자고 이야기했더니, 밖에 다녀오면 종종 내 원룸에 들어와 앉아있던 그. 어떻게 따고 들어왔나 봤더니, 화장실 창문을 뱀처럼 타고 넘어온 것이었다. 새벽까지 맞다가 신발도 못 신고 끌려나가, 술 먹는데 옆에 앉아있다 도망 나왔다. 이사를 갈 때마다 내 주소를 알아냈다는 연락을 해주던 그. 나는 세 번 이사를 다녔다. 그것이 두 번째.


나는 남자 보는 눈이 없었던 걸까. 연애를 많이 했다는 걸 어쩔 수 없이 밝힌다. 중간중간 멀쩡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정상인과 결혼했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 나쁜 남자가 잘  엮였던 걸까. 그런데 남자만 그랬던 건 아니다. 내 친구 중에 하나, 등록금을 훔쳐간 아이.


어렵게 벌어 서랍 안에 넣어둔 등록금. 그 친구가 놀러 왔다 가고 보니 돈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물어도 아니라던 그녀. 연기를 너무 잘해 설마 설마 했다. 그런데 앞에도 이야기했다시피 설마가 사람 잡는 법. 나중에 그녀가 여행 가서 다른 친구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나에게 이스북으로 연락 해왔다. 야! 내 등록금 내놔!


제일 마지막 하이라이트도 있다. 내가 모델할 당시 갑자기 연락이 온 옛날 친구. 어릴 땐 안 그런 아이였는데. 거기다 너무 사근사근 좋게 대해서 껌뻑 넘어갔다. 내가 하는 일을 자기도 해보고 싶단다. 착한 나는 당연히 도왔다. 프로필도 만들어주고, 사진 찍는 법도 전수했다. 아는 사람도 소개줬다. 당장 자기 팬카페부터 만들던 그녀. 내가 한참 바빠서 연락을 몇 통 못 받았더랬다. 그때부터 육두문자가 시작되었다. 인신공격, 협박, 차단하니 전화번호를 바꿔 성희롱까지. 한 달 내내 지속되자 고통스러워 나는 하혈을 했다. 멈추지 않아 결국 경찰서에 스토킹으로 신고했다. 합의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합의하지 않았다. 그 후 번호를 바꿔 또 시작된 테러. 지독했었다.



나는 이 경험들로 귀한 선물을 얻었다. 위험한 사람 알아보는 눈. 덕분에 그 후 나는 연예계 일할 때 수많은 사기꾼들을 피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그들은 말을 잘한다. 겉으로 보기에 정말 손색이 없다. 잘 웃는다. 아이같이 순수하다. 나에게 잘해준다. 이렇게만 봐서는 전혀 모를 일이다. 너무 괜찮은 사람 같지 않은가? 그렇다. 괜찮기 때문에 속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천지에 바보라서 넘어갔겠는가? 정말 괜찮았기에 넘어가는 것이다. 나에게 잘해준다는 항목이 좀 걸리는데, 내 경험에  잘해주는 좋은 사람들도 충분히 있었기에 이건 판단하기에 좀 부족하다.  


빈틈을 드러내는, 이런 사람 만나지 라는 포스팅에 나올만한 사람은 아마추어다. 싫지만 나에게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안심이 될 정도다. 진짜 집요한 프로들은 드러내질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타가 있다. 그들이 속셈을 드러내는 찰나가 있다. 나에게 따뜻하고, 매너 있게 대하고, 한결같이 쿨하고 유쾌한 사람이다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할 때. 그때 아주 살짝 본모습이 나온다. 순한 양 같던 사람이 하이에나의 기운을  발사한다.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나를 사냥감으로 노리는 그 집요한 눈빛을 보아야 한다. 내가 머뭇거리면 살짝 더 집요해짐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내가 잡혀 먹힐 것인지 아닌지 판단 수 있는 마지막 찰나다. 그때 모른척하며 슬쩍  발을 빼야한다. 걸려들면 이후부터는 겉잡을 수 없는 전혀 예상 밖의 전개가 펼쳐기 때문이다


나는 많이 배웠지만 여전히 착하다.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보려고 노력하는데 정말 천성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사람을 가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픈 사람을 보면 또 마음이 동한다. 그래도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 보니 내가 온 길이 헛되지 않은 것 같다. 산전수전 다 겪고 말년에 잘될, 대기만성할 팔자다. 착해도 괜찮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된다. 조금 더디게 가고 지금 당장 알아주지 않아도 결국에는 나타난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에 상처 받고 내 마음이 짓눌려 아플지라도, 내 말과 얼굴이 빛나고 하루하루가 빛나기 마련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진짜는 남는다. 그걸 배워가는 과정일 것이다.


자 그래서 병아리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다시 생각해도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어리고 언니들과 놀고 싶다. 그리고  병아리를 돌려줄 것이라 생각함에 변함이 없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난 후엔 다르게 행동하겠다. 먼저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리겠다. 몽타주를 그려 벽보를 붙여서라도 끝까지 찾아보겠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말해주겠다. 너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 사람들이 나쁜 거지 착한 네가 나쁜 게 아니라고. 있는 힘껏 사람을 배워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라고. 네 이 경험은 아프지만 고통에서 얻은 값진 보물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scene]


병아리를 잃고 벙 찐 나에게 다가간다.


지금의 나: 무슨 일이야?


어린 나: 언니들이 같이 놀자더니 병아리를 훔쳐갔어.


뭐? 병아리를 훔쳐갔다고? 그 언니들 누구야?


모르는 언니들이야.


하... 진짜 황당하다. 어떻게 할까? 지금 찾아보러 갈까?


아무리 찾아도 없어. 멀리 가버린 거야.


저런... 마음이 너무 아프다. 많이 속상하지? 이리 와, 안아줄게.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그제야 엉엉 우는 나. 억울하다. 억울한 감정이 든다. 난 좋은 마음으로 그리한 건데. 거짓말과 도둑질로 돌려받는다니. 내 병아리 돌려줘.


울지도 못할 정도로 얼마나 마음이 아팠니. 일단 부모님께 알리자. 다시 찾아보자.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럼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고말고. 만약 못 찾으면 어떤 언니들이었는지 기억해서 친구들에게 알려주자. 뭐가됐든 그냥 포기하지 말자.


그래 알았어. 병아리 꼭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 언니들이 그럴 줄 전혀 몰랐어. 그냥 같이 놀고 싶었던 거야.


그럼. 당연하고말고. 모르는 게 당연한 거야.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 잘 티가 나지 않거든. 앞으로 배우면 돼. 사람을 배우자. 그리고 네 그 따뜻한 마음, 그건 간직해도 돼. 세상을 원망해 그 사람들처럼 살겠다 망가질 수도 있거든. 그런데 너는 안 그럴 거야. 네 인생 빛이 날 날이 올 거야.


고마워...



[get] 병아리는 찾지 못했지만, 그 대신 정당함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얻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들께. 제가 저번 아픔을 이야기하고 일주일을 앓아누운 거 있죠. 묵혀놓았던 아픔이 건드려 꺼내지면서... 마치 긴장이 풀린 듯 온몸이 띵띵 붓고 잠만 오더라고요. 예전 심리상담 때, 가장 아팠던 기억을 하나 꺼내 감정을 폭발시키고 위궤양걸려 보름을 아팠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니 그 살아있던 기억이 잠들더라고요. 아픔 쓰고 나누기 치유 효과가 상당한 것 같아요 :) 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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