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밉다.
써놓고도 두려운 말이다. 읽은 분들도 화들짝 놀라셨을지 모른다. 내 아이가 밉다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한때 내 아이가 너무 미워 위안을 얻고자 검색을 했다. 그런데 아이가 밉다는 글을 올린 엄마가 어느 커뮤니티에도 없었다. 소리 지르는 아이, 까다로운 아이, 인사 안 하는 아이 다 있었는데, 내 애가 밉다는 글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나마 한두 개 올라와 있는 글은 엄마가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 같았다. 그럼 그렇지. 돌맞지 않으려면 그 생각과 말을 철저하게 숨겨야 한다.
한데 정말 그렇다. 육아가 즐겁기만 하고 아이가 사랑스럽다고만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정말 너무 힘들 땐 다들 극한 행동 극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오래가면 엄마의 본능조차 무너진다. 내 아이가 이뻐야 하는 본능.
엄마는 기본적으로 모성애를 타고났다. 임신과 출산으로 자연스럽게 아이에 대한 사랑이 생긴다. 아이 사진으로 SNS를 도배하고, 사람을 만나면 아이 얘기만 하게 된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랬기에 생존해왔다. 그런데 그 중요한 모성애가 차단되었다니. 대체 어떤 상황인 건가.
먼저 내 생명이 위협받는 때다. 몸이 아프거나, 밥을 못 먹거나, 잠을 못 잤을 때. 하루 이틀이면 상관없지만 날이 길어질수록 나빠진다. 애 키우다 죽은 사람은 없다고 어른들은 말한다. 근데 뛰어내린 사람은 있더라. 그걸 몸이 아는 것이다. 애는 둘째치고 내 생각을 하게 된다.
두 번째는 내 정신이 위협받는 때다. 마음이 아프면 엄마들은 흔히 우울증이 걸린다. 우울증은 도망가지 못해 자유롭고픈 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무시하지 말아야 할 신호다. 마음이 아픈 것도 몸이 아픈 것처럼 위험하다. 아이가 하는 행동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감정이 담기지 않게 된다. 정신과 몸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정신이 위협받으면 행동과 몸이 아프게 된다.
나의 경우는 둘 다였다. 둘째를 낳고 고통이 극에 달해 몸도 아팠고 마음도 아팠다. 더블 어택으로 정신이 혼미한 나. 아무리 외쳐도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차라리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렵게 구한 도우미는 어쩜 이런 아기가 있냐며 하루 만에 도망가 버렸다. 내 생존의 뇌가 팔딱거렸다. 한동안 가면 웃음으로 첫째에게 연기하듯 대했다. 못 느꼈길 바라지만 섬세한 아이라서 다 느꼈을 것이다. 내가 살고 싶어 아이가 미워졌다. 내가 살아야 아이도 산다는 건 알지만, 그게 미워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는가. 이럴 땐 어떻게 하는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 아이를 내팽개칠 순 없지 않은가. 그럴 때 나는 김경림 저서의 <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에서 이 구절을 만났다.
양가감정을 느낀다는 걸 알아챈 엄마는 곧바로 죄책감에 빠진다. 마치 근친상간이라도 저지른 듯 화들짝 놀란다. 사회가 아이를 미워하는 엄마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 흘러가던가. 아무리 한결같은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해도 현실은 늘 배반의 시나리오를 펼친다.... 엄마라는 독립된 개인의 욕구는 아이라는 독립된 개인의 욕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화, 짜증, 당황스러움, 미움 등의 불편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문제는 엄마들이 아이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없애려 하거나 감추려고 할 때 벌어진다. 아이가 미워진 엄마는 양가감정의 원인을 아이에게서 찾고, 아이를 ‘좋은 아이’로 만들려 필사적이 된다. ... 반대로, 아이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감추려는 엄마는 아이의 모든 욕구에 먼저 응답하려 한다. ... 그러나 이런 시도는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아이를 억압하든 엄마를 억압하든, 그 불편한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일어났을 때, 하나의 감정이 다른 감정을 집어삼키게 하지 않고 함께 지닐 수 있는 능력을 정신건강이 좋다는 하나의 신호로 본다. 그래야 감정을 억누르거나 모른 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적인 현실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리산으로 내려온 지 3년 때 되던 어느 가을날, ... 인생을 꼬이게 만든 아이가 원망스러웠고, 이렇게까지 애쓰는데 보답은커녕 계속 바라기만 하는 것 같은 아이도 보기 싫었다. 운전대 위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 큰 한숨 내쉬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어느새 아이를 향한 미운 감정은 마치 한바탕 소나기를 퍼붓고 지나가는 여름 비구름처럼 사라져 있었다. (저자는 첫째 아이의 희귀 암으로 10년의 암투병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사람들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그전에 엄마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엄마 본인이 갖는 아이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마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는 없다. 엄마들이 먼저 자신의 편이 되어 스스로에게 사랑을 듬뿍 주어야 하는 이유다. 결함투성이의 나, 이중적인 나, 이기적인 나를 따뜻하게 안을 수 있어야 아이에게 사랑이 전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글 하나로 나의 눈 녹듯 녹은 감정. 정말 많이 울었다. 이거다 싶었다. 나 혼자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구나. 나만 나쁜 년인 거 아니구나. 나 정상인 거 맞지? 다들 이렇게 아픈데 철저히 숨기고 있는 건가? 그럼 많이 힘들었다고 광고하는 내가 열심히 떠벌려 주어야겠다.
나의 양가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보듬어야 아이에게도 그리할 수 있다. 공론화하기 어렵고 실천하지 않았을 뿐, 너무 힘들 땐 다들 극한 생각까지 해봤을 것이다. 나는 아이가 미웠을 때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도 죄책감에 더 열심히 웃으려 반응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이를 자각한 후로는 매일 밤마다 일기에 솔직한 감정을 토해냈다. 내가 왜 힘들었는지. 아이를 향한 내 부정적인 마음까지도. 하고 나면 후련했다. 다음날 영향받지 않을 수 있었다.
엄마는 힘들 땐 악마가 될 수도 있다. 나의 그 두 모습을 다 받아들여야 어디 어느 시점에 못난이가 나오는지 파악이 된다. 그제야 육아에서 조심할 것, 위험, 괜찮음이 구분된다. 비로소 그때 나 스스로에게 적절한 한계 설정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이 주도 이유식이 좋다지만 아이가 음식을 바닥에 다 문지르며 놀면 어떤 엄마는 너무 힘들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최대한 노력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내 마음을 인정하고 떠먹이는 것도 괜찮다. 어떤 엄마는 아이가 장난감 칼로 자신을 찌르면 격하게 폭발할 수도 있다.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경우다. 그럼 그냥 그 놀이는 안 하는 것이 낫다.
천사와 악마 두 가지 모습 중 긍정적인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한계 설정이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양가감정을 올곧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수라 생각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