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탓 그만. 진짜 필요한 건 도움
난초 엄마도 난초 아이도 문제가 아니다
첫째 30개월 즈음부터 도약기마다 내가 감당 못할 만큼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사랑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사실 모유수유가 끝나서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 설상가상 동생도 생겼다. 이전 18개월 힘들 때 그랬듯 발달장애 카페 글들을 읽으며 방법을 계속 찾았다. 대다수 내가 겪는 이야기 같았다. 지지 아닌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자, 내 눈에 첫째의 어려움이 고쳐야 하는 커다란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엔 반응적으로 상태 봐가며 아이를 도왔었다. 매일 나는 아이를 치료해주기 위한 알파맘이 되었다.
아주 짧은 시간 약 한 달 그랬지만, 아이와의 관계가 미묘하게 삐걱임을 느꼈다. 화도 났다. 처음엔 아이한테 화가 났다. 그다음엔 나 자신한테 화가 났다. 아이의 힘든 부분을 실제 고쳐야 하는 문제로 보기 시작하자, 아이를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단점까지 껴안아야 온전히 사랑함인데. 그 부분을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걸 사랑하는 게 맞나? 단점을 사랑한다면 그 부분을 인정하고 내버려 두는 게 맞는 거 아닌가? 난 뭔가의 모순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내 능력으론 어려웠다. 아이 그 자체 모습 그대로, 장점, 단점, 불균형까지 온전히 사랑할 방법을 찾으며 기도했다. 인간의 힘이 아닌 종교의 힘을 빌어야 했다. 내가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 이것이 은사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첫째의 강한 부분이 달란트라면, 약한 부분도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은사가 아닐까? 거꾸로 내가 첫째같이 약한 부분과 강한 부분이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 걸 엄마한테 바라게 될까 생각을 해봤다. 나라면 내 강한 부분은 지지해주었으면 좋겠다. 약한 부분은 고치려 하지 말고 그냥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대신 내가 힘든 게 있으면 그 부분은 도와줬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이 들었다.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나는 긍정주의자였다. 항상 상황을 좋게 결론짓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그게 내 캐릭터였다. 아마 첫째 석돌 즈음까지 그랬던 거 같다. 거기다 난 첫째 낳기 전 요가를 했다. 습관성 유산으로 오래 고생했기에 시작했었다. 요가를 하며 내 몸과 현재에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 효과는 좋았던 것 같다. 임신과 출산을 해냈으니까. 너무 좋아서 하루라도 안 하면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첫째 석돌까지 매일 아침 짧게 요가 명상을 했다. 그걸 둘째 임신하며 못하게 되었다. 그냥 잊어버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너무 놀랐다. 내가 왜 모든 걸 싸그리 잊고 이렇게 된 걸까? 긍정적인 내가 갑자기 왜 아이의 단점만 보게 된 걸까? 왜 아이와의 하루를 유지하던 작은 의식마저도 잊은 걸까? 마치 내 뇌에 지우개가 있는 것처럼 그리하였다. 납득이 안돼서 몇 날 며칠을 생각했다. 그러다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원시뇌 상태였던 것 같다! 아마도 둘째 생기고 입덧이 시작되면서부터. 책 읽기나 글쓰기 등 몇 가지 방법으로 연명했기에 생각하는 기능을 아예 안 쓰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능이 일정 부분 약해지고, 생존의 뇌가 강하게 지배하게 된 것이다. <스트레스에 강한 아이>에서 읽은 스트레스시 원시뇌 반응이 떠올랐다.
원시뇌(생존 뇌) 상황에서의 행동 반응
1. 주변 도움을 찾음
2. 투쟁 or 도피 중 하나를 선택.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도 처음엔 주변 도움을 찾았다. 친정에서 조금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친정 도움이 도움이 아니었다. 둘째 케어 중 친정 엄마는 과하게 힘들었는지 이상해지셨다. 친정이 답이 아니니 남편에게 의지했다. 그런데 남편은 당연히 도움이 안 되었다. 싸움만 일어났다. 그래서 난 생존을 위해 투쟁이냐 도피냐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큰 힘듦을 주던 첫째의 힘든 성향과 투쟁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도움을 받으려는 부모들은 아이에 대해서 진단부터 받고 딱지 붙이기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다음에는 이런저런 관계자들에게 비록 아이가 그런 딱지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를 뿐 지능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도움이 필요하나 시설 입소나 약 처방은 필요 없다는 등을 설명하느라 진을 뺀다. <내 아이는 생각이 너무 많아> by 크리스텔 프티콜랭
나만 충격적인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심하게 힘든 엄마들은 이 상황에 서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치료하려고 해보았을 것이다. 그냥 회피해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전엔 주변 도움을 간절히 찾았을 터이다. 그런데 도움은 커녕 해가 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설상가상 사회성이 안 따라주거나, 사랑을 못 받고 자랐거나, 혼자 해결하려는 성격일 때는. 더욱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그렇담 왜 원시뇌 상황이 되느냐도 생각해보았다. 내 생각은,
내가 버틸 수 있는 정도 << 어려움의 크기
내가 봤을 때 웬만한 난초 부모라면 그동안 삶의 내공이 있기에 인내심이 대단할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겪는 어려움이 너무 크면 생존에 위협받는 상황이 된다. 뇌는 전시 상황이라고 판단해 원시뇌를 가동한다.
친정 엄마 옛날 생각이 났다. 미국에 엄마랑 동생 둘이 있을 때 911이 터지고 사업이 망했다. 엄마는 투잡 쓰리잡을 뛰며 고액의 집 대출금을 충당했다. 고등학생인 동생은 동생대로 알바 뛰고 엄마 케어를 받지 못했다. 난 그 일을 굉장히 비난했다. 왜 집을 팔고 싼 아파트로 이사 가지 않았냐. 그 돈으로 동생 학비도 댈 수 있었을 텐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동생을 케어하지 않는 등,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했다. 엄마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어느날 400억원의 빚을 진 남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창창가도를 달리던 어느날,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400억원의 빚을 물려받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왜 그걸 그냥 내려놓고 파산하지 않았냐고 묻는단다. 그는 말한다. 그저 당연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느꼈다. 파산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부분을 작가는 많은 페이지 할당해서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보인다. 간단히 당신, 생존의 뇌가 활성화된 상황이었군요. 생각의 뇌가 마비되었군요.
사람은 원시뇌 상태가 되면 있는 걸 지키려 한다. 시야가 좁아지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보다는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원시뇌가 가동된 시야가 좁아진 부모는 자신을 탓하거나 아이를 비난한다. 그렇담 버틸 수 있는 정도에 비해 육아 어려움이 큰데. 궁극적으로 뭐가 문제일까? 해결방법이 뭘까? 생각해 보았다.
엄마 그릇이 작은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보통 엄마들도 육아가 힘들다고 한다. 그럼 기질 강한 아이가 너무 힘든 걸까? 힘든 게 맞지만 그건 그냥 타고난 거다. 그게 내 사랑하는 아이의 모습이니 문제는 아니다. 그럼 기질 탓을 해야 하나? 이해하고 방법을 찾는 건 옳다. 하지만 그걸 탓하며 고치려하지는 말아야한다. 기질은 우리의 일부분이니까.
난 도움의 부재를 궁극적 문제와 해결방법으로 결론지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이 단계까지 오지 않는다.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 잠깐의 쉼이 필요하다. 아이도 엄마도 문제가 아니다. 고정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냥,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나는 이를 깨닫고 도움을 받으려는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꼭 사람의 도움이 아니다. 공간, 자연, 책, 전문가, 기관, 종교 등을 활용해 본격적으로 환경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일부 활용했지만 좀 더 적극적이 된 것이다. 도와주는 사람들이 상시 옆에 있다면 훨씬 쉬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더욱 많은 방법을 찾아냈고 더욱 할 말이 많다. 그러면서 내 육아의 2막이 펼쳐졌다. 조금 더 일찍 방법을 알았다면 좋았을 걸. 이어 좀 더 이야기해보겠다.
당신도, 당신의 아이도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도움이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