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명예사서로 활동 중입니다
수요일은 아이들의 학교도서관에서 봉사활동하는 날이다.
휴직 중인 나에게 유일한 공식적인 스케줄. 이날만큼은 운동복 대신 슬랙스와 셔츠를 입는다. 화장도 약간 하고 머리카락에도 컬을 넣는다. 나는 내 딸들을 통해서 안다. 어린이들이 어른을 얼마나 관찰하는 지를. 보리는 옆반선생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다.
-엄마, 2반 선생님 있잖아. 머리가 여기까지 길고 얼굴이 하얗고 손도 하얗고 예뻐. 손톱에 색깔도 칠했어, 우리 외숙모처럼! 엄청 깨끗하고 예뻐. 선생님이 지나가니까 좋은 냄새도 났어. 게다가 핸드폰이 아이폰 16 프로야.
정확히 어디가 예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애들은 자기 맘에 든 걸 빼곡히 기억해서 칭찬한다. 나도 아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면 그들이 도서관에 더 자주 올까? 생각하며 평소보다 좀 더 오래 거울 앞에 선다.
점심시간에 담이가 도서관에 나타났다. 처음 보는 친구와 함께였다. 어서 오세요~! 나는 늘 하던 것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담이가 나에게 자기 친구를 보여주려고 데려온 듯했다. 아이는 나를 빤히 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안녕하세요?를 예상했는데 빗나갔다.
-담이 엄마예요? 예쁘네요.
초등2학년 어린이의 세상 시크한 말투에 잠시 당황한 나는 2초 늦게 반응했다.
-어..? 고마워요, 하하
그 아이가 소운이었다. 담이가 친해지고 싶어 하는데 자꾸 곁을 안 준다던. 소운이는 '오늘은 너 말고 다른 애랑 놀고 싶다'며 담이를 애닳게 하곤 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마이쮸를 꺼내 어린이들의 손에 쥐어주며 싱긋 웃었다. 소운이는 고맙다며 고개를 까딱 하더니 나갔다. 담이가 황급히 뒤따랐다. 분명 어린이인데 어린이 같지 않은 포스가 있었다. 담이가 저 매력에 빠진 건가? 소운이가 오늘은 담이랑 같이 놀기로 한 건가? 다음 주에 또 오려나? 다음 주에도 화장을 하고 와야겠다. 왠지 나도 잘 보여야 할 것 같다.
방과 후 3시쯤 도서관에 오는 1학년 남자아이가 있다. 오늘도 그는 마루에 앉아 학습 만화 <그리스로마신화 대모험>을 신나게 읽고 있었다. 집중한 미간엔 주름이 잡혀있고,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는 오른쪽 콧구멍을 열심히 후비면서. 콧구멍 깊숙이..구석구석 청소하던 손가락이 마침내 나왔다. 손가락 끝엔 여기서도 보일만한(내 자리에서 그곳까지는 약 5m) 거대한 코딱지가 붙어있었다. 저것을 어떻게 할지 알 것 같아서 나는 긴장했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튕겨 날리기를 시도했다. 아악!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실패다. 코딱지의 제형이 너무 끈적거리는 것 같다. 아이는 몇 차례 더 손가락을 튕기다가 포기한다. 그리고는 너무 자연스럽게 코딱지를 옆에 있던 소파에 쓰윽 문지르며 닦았다. 내가 두 눈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는데도 아이는 전혀 모른다. 그 놀라운 집중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도서관에 아무도 없(어야 하)는 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저쪽 나무기둥 뒤에서 아이 한 명이 책을 들고 나온다. 키가 110cm는 될까. 유난히 몸집이 작은 여자 어린이다. 행동거지가 부쩍 조심스럽던 아이, 아까 머뭇거리며 들어왔던 것이 기억났다. 어? 근데 지금 1시 4분인데? 1학년은 1시에 점심시간 끝났는데? 나는 아이가 놀랄까 봐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장착하여 말했다.
-1학년이지요?
-(기어가는 목소리로)네.
-점심시간 끝나서, 교실 가야 될 시간이에요. 책은 주세요, 선생님이 정리할게요.
-...(어리둥절한 얼굴)
-괜찮아요, 교실 들어가서 담임선생님한테, 도서관에 있다가 시계를 못 봤어요, 이렇게 말하면 돼요. 뛰지 말고 가요.
-네..
그 작은 아이는 발소리도 내지 않는다. 먼지 한 톨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사뿐사뿐 걸어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3월, 1학년 신입생들은 이 커다란 건물에서 아직도 적응 중이다. 저 아이는 유치원 때가 그리우려나? 많이 귀엽고 조금 짠했다.
도서관은 건물 1층,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화창한 오후에 화재경보가 짧게 울렸다. 그 소리에 편한 자세로 책 읽던 아이들이 후다다닥! 가방을 들쳐메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듣자마자 오작동이라는 걸 알았는데(그러면 안 되지만 소방경보가 잘못 울리는 경우가 잦다), 아이들은 일사불란하게 대피한 것이다. 그들이 있던 자리는 순식간에 휑- 비어있었다. 사서선생님과 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아이들이 너무 잘 배웠네요!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기특했다. 잠시 후 '조금 전 화재경보는 오작동이었습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뛰쳐나갔던 아이들이 우르르 돌아왔다. 어린이들은 다시 책을 집어 들고 바닥에 엎드려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소방대피훈련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었다.
이 아이들이 계속 이렇게 대피를 잘하면 좋겠다. 아니, 대피할 일 없는 안전한 세상에 살면 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