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11)
2024년 4월 28일 일요일 (9일 차)
나바레테에서 붉은 바위산이 있는 나헤라까지
어젯밤 우리 방에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소동이 있었다. 독일 할머니의 코 고는 소리에 캐나다 아저씨가 박자를 맞춰 맞장구를 치면서 온 방 안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대포소리, 총소리가 밤새도록 울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몸이 피곤해서인지 코 고는 소리에 박자를 맞추다 어느덧 잠에 빠지고 아침까지 잤다. 이제 진정한 순례자가 된 것 같다.
일요일 아침 7시 나바레테를 출발했다. 비가 온 탓일까? 아침 햇살은 화려하게 떠 올랐는데 제법 쌀쌀하고 손이 시리다. 늦게 출발해서인지 얼마 걷지 않았는데 등 뒤로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떠오른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으려나 보다. 이 또한 감사하다.
어제 거리를 단축해서 걸었음에도 발목은 여전히 불편하다. 앞으로 며칠을 더 가야 대도시 ‘부르고스’가 나오고 그곳에나 가야 병원을 들려볼 수 있을 텐데... 일단 오늘은 오늘에 충실하자. 오늘도 거리를 단축해서 ‘나헤라’까지만 무사히 가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마을 공동묘지가 보인다. 한때 세상을 호령했었을 사람들, 힘들고 억울하게 살다 간 사람들이 누구나 한 두 평 되는 땅만 차지하고 함께 누워있다. 세상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건, 어떤 대접을 받았든지 죽음 이후에 육체는 이 작은 무덤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한 하늘나라에 있어야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지나가는 마을인 나바레테에서 하루를 자고 출발하다 보니 까미노에 걸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오히려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길이 되어 너무 좋았다. 한적한 포도밭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순례길을 처음 출발할 때 보다 포도 잎들이 제법 많이 자랐다. 그만큼 나의 순례길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리라.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삐에뜨로’라는 청년을 만났다. 직장에서 보름간 휴가를 내고 왔는데 순례길을 3번에 나눠 걸을 예정이란다. 많은 유럽 사람들은 800km를 한 번에 걷기가 부담스러우니 이런 식으로 2~4번 나눠 걷는단다.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청년이었는데 내 다리 형편으로는 청년의 발걸음을 따라갈 수 없어 결국 먼저 가게 했고 삐에뜨로는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져 갔다.
두 시간여 걸어 6.7km를 갔다. 천천히 걷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벤토사’라고 하는 인구 200명이 안 되는 포도밭 마을이다. 예술인이 사는지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 온통 조형물과 사진들을 전시해 두었는데 예사롭지 않다. 어제 같은 방을 썼던 한국인 청년이 길가에 쉬고 있어 자세히 보니 다리 근육이 뭉쳐 올라가 있는 모습이 나와 유사하다. 이야기 좀 나누려 하니 먼저 가겠다며 일어서 가버린다. 뭔가 고민이 많은 것 같은데 영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일요일인데도 작은 카페가 영업 중이라 오렌지 주스와 작은 빵 하나를 주문했다. 카페 벽에 있는 세계지도에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국적을 작은 핀으로 가득 꽂아 놓았다. 나도 한국 위치에 핀 하나 추가했는데 벌써 여럿이 다녀간 듯했다. 일요일 아침 일찍 문을 연 카페가 있는 것이 신기했지만 마을 아저씨들이 이 이른 시각에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것도 생소하였다.
하루 종일 포도밭 길을 걷는다. 리호아 와인 산지답게 온 들판이 포도밭이다. 예전에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이나 캘리포니아 나파, 소노마밸리 와이너리를 다녀 봤지만 여기 리호아는 또 다른 모습이다. 보다 자연스럽다고 할까? 짜임새가 없다고 해야 할까?
저 멀리 들판 끝에 높은 산이 있고, 정상 부위에는 아직도 하얀 눈이 덮여 있어 우기가 아닌 여름에도 눈 녹은 물로 너른 포도밭에 물을 대 줄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곧 5월이 되어 가는데 까미노 곳곳에 눈이 왔다는 정보가 들어온다. 첫날 넘어온 피레네산맥은 이틀 후 눈보라가 몰아쳐 폐쇄되었다고 하고, 앞쪽 산티아고 도착 직전의 산악 지역에는 지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며, “단디 준비하고 오라”고 연락이 왔다.
발목이 아프다. 통증의 정도가 그냥 아프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바늘로 찌르거나 칼로 베는 듯 아프다. 통증으로 그만 멈추고 싶을 정도인데 도로표지 멈춤 표지판에 누군가 낙서해 놓았다. "DON'T STOP WALKING!” 그래 맞다 멈추지 말고 계속 걷자··· 우선은 오늘만 생각하자.
어? 어떤 아저씨가 반대로 걸어오고 있다. 설마? “산티아고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중이냐?"라고 물어봤다. 가끔 산티아고 도착 후에 아쉬움에 순례길을 마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 ‘존 오웰’이란다. 프랑스 집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까지 갔다가 프랑스 집으로 되돌아가는 중인데, 지금까지 1,600km, 총 3,000km 걷게 될 거라고 한다. 세상에···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걷게 했나 궁금하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나에게 "갈 길이 멀다. 미안하다" 하면서 사진 한 장 남기고 종종걸음으로 길을 간다. 처음에는 기도 안 차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후 유사한 사례를 반복해서 만나다 보니 “나도 산티아고 도착하면 반대로 되돌아올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변하게 된다. 하여간 대단한 사람들인 건 맞다.
오늘은 걷는 거리가 짧아 이른 시각에 ‘나헤라’에 도착했다. 도시 입구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복음 전도를 한다며 서 있다. 오늘은 일요일이니 교회에 갔다가 청년회에서 나왔구나 하는 생각에 반갑게 다가가 사진 찍고 성경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뭔가 자꾸 이상해진다. 결국 정상적인 기독교와 다른 단체로 판결이 났고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도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신앙이다. 그들은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한 것이다.
나헤라는 로마시대부터 있었다는데 바위 사이의 도시라는 아랍어 ‘나사라’에서 유래되었다. 이 마을 뒤편에는 붉은색의 제법 높은 바위산들이 둘러져 있어 바위 사이에 건설된 도시처럼 보이긴 하다. 숙소는 ‘나헤리아’라는 제법 큰 강을 건너 붉은 바위산 바로 앞에 있는 깨끗한 아파트였다.
강가 노천카페에 배낭을 내렸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의자에 앉아 산 후안교를 건너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오후 1시가 넘어가니 무척 뜨겁기 시작했고, 다리를 건너는 순례자들의 지친 걸음은 한눈에도 확인되었다. 오늘도 무사히 걸을 수 있었음에 감사, 비가 내리지 않았음에 감사, 잠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음에 감사, 그리고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음에 감사··· 온통 감사함으로 오후를 즐기다 숙소로 이동하였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방 2개와 거실, 욕실이 있는 제법 규모 있는 아파트였다. 오늘은 슈퍼마켓에 가서 뭐 좀 사다가 요리를 해 먹을 심산이었는데 아뿔싸 오늘은 일요일이다. 아무것도 살 수 없다. 정말 이 순례길에서는 뭐가 잘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점심을 잘 먹었으니 저녁은 대충...
밤이 되자 이 큰 집에서 할 일이 없다.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배낭을 열어 모든 물건을 바닥에 쏟아놓았다. 아무래도 가방을 가볍게 하는 것이 순례자 정신에도 어울리고 내 발목 근육통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다. 우선 3벌 챙겨 온 양말 하나를 버렸다. 한국에서부터 애지중지 챙겨 온 비상약도 버리고, 잘 입지 않을 것 같은 셔츠 하나도 버렸다. 언제 먹을지 모를 동결건조 미역국과 라면 수프도 버렸다. 하나 가져온 스포츠 타월도 2/3 정도를 잘라 쓰레기통에 버렸다. 염려의 무게만큼 더 챙겨 온 물건들을 버리고 나니 서운함 보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내려놓음, 더 내려놓음이 염려를 내려놓은 것으로 귀결되고 마음을 편케 하는 것 같다.
무언가 잡으려, 가지려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고, 그렇게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다 해도 마음 한가운데 허전함이 여전한 것이 인생살이 같다. 비운만큼 채워지고, 내려놓는 만큼 올라간다는 그 진리 앞에서도 나는 여전히 작은 물건 하나 버리지 못하고 여기까지 이고 지고 온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사회에서 직장에서 나름 열심히 쌓아 올린 명예, 지위, 권한 그 어떤 것인들 내려놓기가 쉬울 수 있겠는가?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을 것이니 남은 순례길에서 내려놓고, 버리고, 없애는 용기를 가져야겠다. 그래도 오늘 나는 당장 살기 위해 버려야 했고 이제 살 것 같다.
숙소는 더없이 좋았고, 배낭에서 많은 것을 버렸으니 내일부터는 좀 더 편하리라.
넓은 침대에 큰 대자로 뻗고 편하게 잤다.
마음껏 코를 골면서……
https://youtu.be/FadNjdc9N5M?si=bEbnyI0IqJvMFxt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