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더 잘하려 하지 말자

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27)

by Kevin Kim

2024년 5월 15일 수요일 (26일 차)

'까까벨로스'에서 작은 강이 흐르는 '암바스메스타스'까지




주인이 자기네 호스텔 중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방을 주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방도 크고 따뜻한 물로 샤워도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며, 제법 따뜻한 난방이 제공되어 속옷도 빨아 말리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숙소를 빠져나와 마을을 관통하는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마을 성당 앞은 행사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올 농사 풍년을 기원하는 중요한 날이라고 한다. 12시가 되면 인근 모든 농부가 트랙터를 가지고 와서 올해 포도 농사의 풍년을 기리는 축제를 한다고 하는데 아쉽지만 나는 갈 길을 가야 했다. “올해, 이 마을 포도 농사 대박 나세요~~”

포도농사 풍년을 기원하는 꽃 장식


비가 온다. 어떤 사람은 순례길을 걷는 내내 비다운 비 한번 안 왔다고 하던데 올해는 어찌 하루 건너 비가 내린다. 오늘도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려나 보다.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독일 3 부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준다. 이 사람들은 며칠 전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를 나에게 맡기고 갔던 사람들이다.


마을 어귀에 작은 강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 유명한 공립 알베르게가 있다. 이곳은 퀸타 앙구스티아 성소의 부속 알베르게이며, 중세 시대부터 순례자들을 돌보아 온 유서 깊은 알베르게로 알려져 있다. 어떤 모습인지 들어가 볼 수 없었는데 담장 너머로 바라보다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이 알베르게와 성당은 수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의 땀과 피를 받아냈을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경건함을 느꼈다.

까까벨로스의 유명한 공립 알베르게가 운영되는 성당


‘피에로스’ 마을을 지나 3km 정도는 계속해서 오르막이다. 그리고 오르막 끝부분에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나는 포도밭을 따라 걷는 시골길을 택했다. 끝없는 포도밭 사이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참 예쁜 길이었다. 여기가 바로 ‘비에르소’ 포도주 주산지이다.

비 내리는 그리고 사람 없는 포도밭길을 몇 시간 걸어 본 적이 있는가?


비 내리는 가운데 포도밭 사이 길에는 오랫동안 나 혼자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순례자 대부분은 이 길로 오지 않고 거리가 가까운 대안길로 간 것이었다. 사람 흔적 없는 마을, ‘발투이야 데 아르리바’를 지나 한참을 걸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사람이 없다. 알베르게나 카페도 없고 마을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너무 조용했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외로운 이방인 순례자만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생각으로 한참을 걸었다.


몇 번의 고개를 오르고 내려가자 지금까지의 수고를 보상이라도 해 주려는 것처럼 갑자기 눈앞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비도 그치고 무지개가 떠 올랐다.


너무 아름다운 전원 풍경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시간을 보내며 아름다운 풍경을 눈과 마음에 담았다. 포도원 한가운데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위에 하얀 집 한 채가 균형을 잡듯 서 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집주인의 성격이 보일 정도로 깔끔했다. 가까이 가 볼 수는 없지만 아마 저 집 마당에는 사계절 꽃이 피고, 마당 한 편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키 작은 분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소나무 아래에는 손자를 위한 작은 그네가 달려 있을 것이고, 마당에는 언제나 강아지와 손자가 함께 뛰놀 것이다. 지금도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나는 토스카나 어느 포도원처럼 느껴졌다


제법 큰 마을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 있는 카페에 한국에서 어머니와 함께 온 젊은 아들이 함께 쉬고 있다. 보기 좋은 장면이다. 아들은 자주 어머니께 투덜거리고 핀잔을 주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것 또한 우리 내 살아가는 모습이라 생각하며 웃곤 했었다.


사실 이들 가족은 론세스바예스 저녁 식탁에서 한 테이블에 앉았던 가족이고 여기까지 오던 중간에 몇 번이나 만났던 순례자인데 조금 차가워 보인 아들에게 말을 걸어 보지 못하고 있던 터이다. 이번에 용기 내어 말을 걸어본다.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이 너무 살갑고 따뜻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다정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나의 편견과 잘못된 선입관이 만든 잘못이었다.

‘편견을 깨다’를 영어로 하면 ‘Think out of the Box.’로 쓴다. 그동안 나는 어쩌면 작은 상자 안에 나만의 소우주를 만들고 내 위주로 판단하고 평가하였을 것이다. 과감하고 단호하게 나를 덮고 있는 작은 상자를 걷어차고 나왔어야만 했다. 이 아들에게 이제야 말을 걸어본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머물다 출발하려는데 마을 이름이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이다. 여기가?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마을 이름인데? 그랬다. 예전에 '스페인 하숙'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마을이다. 당시 나도 미국에 살면서 저녁에 외로울 때면 ‘스페인 하숙’을 즐겨 보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이 나의 버킷 리스트 한가운데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었다. 이 방송 덕분에 순례길에 그렇게도 한국 사람이 많아진 걸 보면 방송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스페인 하숙의 배경이 되었던 비야프랑카 마을


9세기경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으면서 마을이 구축되었고, 이 마을 주변으로 프랑스 순례자들의 자치구가 생기면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적혀 있다.

마을로 들어서니 방송에서 보았던 그 광장과 식당, 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스페인 하숙을 촬영했던 장소는 여전히 알베르게가 운영 중이라는데, 용무도 없이 그저 호기심에 찾아오는 한국 사람에 대해 주인이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나는 들려보지 않고 바로 지나쳤다.

마을 어귀에 있는 슈퍼를 지나가는데 온통 한국 라면, 소주, 한국 생활용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스페인 하숙의 영향일까? 작은 가게에 소주. 라면 없는 게 없다


반가운 마음에 뭔가 사고 싶었지만 배낭의 무게를 더 늘릴 수 없어 눈으로만 바라보다 지나쳤다. 그리고 차승원 씨, 유해진 씨가 이야기 나누며 산책했던 그 도로를 따라 오늘 내가 혼자 걸어가고 있다. 다시 비가 온다. 이제 속도를 더 내야만 한다.


이제 남은 거리가 184km이다. 남은 거리 300km부터는 정말 숫자가 빠르게 줄어든다. 많은 순례자가 이쯤에서부터 체력이 올라가고 순례길은 익숙해지는데 남은 거리가 짧아짐에 점점 우울해진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근육통도 다 나았고 다리에는 제법 힘이 붙었는데··· 이제부터 진짜 잘 걸을 수 있는데··· 남은 거리가 얼마 되지 않다는 생각에 많이 아쉽다.

너무 빨리 줄어드는 숫자가 이젠 부담이 되어 다가온다


이 길은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을 위해 온 것이다. 이 싸움에서 지고 싶지도, 이기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나를 찾고자 했고, 이제 나를 찾아가고 있다. 이 순례길 끝에서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될 것을 부푼 마음으로 기대하며 오늘도 걷고 있다.


뭔가 더 잘하려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이 길을 따라 걸으며 까미노가, 나무가, 숲이, 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머리로 들어온 생각을 마음으로 정리해 보면 더 깊은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단순하게 나타난 현상에 대해 신뢰하고 순종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까미노에서는 내 생각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참 많다. 나는 극 ESTJ로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너무 힘든 사람이다. 그런데 순례길에서는 계획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오늘도 그랬다. 몇 시간을 걸어 ‘페레헤’ 마을에 왔다. 당초 이 마을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휴대전화도 충전하고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마을 전체에 문을 연 곳이 없다. 다시 5km 더 가야 다음 마을이 있는 데 다시 참고 간다.


그런데 5km를 걸어 ‘트라바데로’ 마을에 도착해 보니 유일한 카페에 자리가 하나도 없다. 그냥 가기로 했다. 다시 5km를 더 가야 다음 마을이 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별문제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미 나는 계획에 벗어난 이 현상이 매우 힘겹다. 커피 한잔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결국은 10km 이상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조언을 해 주었다. “순례길에서는 그 계획마저도 버려라. 그러면 새로운 계획이 세워질 것이다.”

기다리고 고대했던 카페가 나타났는데 문을 닫아버렸다


설상가상 휴대전화 배터리도 다 되어 간다. 보통은 중간에 카페에 들어가서 충전하고 가지만 오늘은 내내 카페에 들어가지 못하다 보니 이제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길은 멀고 신체 배터리도 내 휴대전화 배터리도 동시에 붉은 불이 깜박인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것이 순례길의 정석이라니 그냥 갈 데까지 가보자.” 포기하고 걸어보니 이것도 나름 괜찮다.

또다시 산으로 까미노 길이 이어지고 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산을 오를 것이다


까미노에서는 이상 현상도 자주 나타난다. 15~20km를 넘어서면 몸이 많이 지쳐간다. 특히 12kg의 배낭이 주는 무게는 고스란히 어깨부터 허리, 무릎, 발목으로 내려간다. 오늘처럼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은 더욱 힘들고 지치게 된다. 이때쯤 되면 머리에서는 다리에게 "이제 그만 Stop!"을 외친다. 그런데 다리는 귀를 막고 그냥 계속 걸어간다. 결국 무아지경이 되고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걷게 된다.

"저 언덕만 넘자, 다음 마을까지만 가자" 하며 그냥 걷는다. 소위 자동차 ‘자동주행 모드’같이 된다. 결국 견디다 못한 머리가 팔에게 화를 낸다. "야! 팔! 너도 좀 도와라! 다리를 도와서 힘 있게 스틱을 딛으란 말이야~"


결국 머리가 이겼다. 아니 다리하고 타협했다. 배낭을 내리지 않고, 어디 앉지 않고 그냥 잠시 섰다 가기로 합의가 끝났다. 그리고 비 내리는 길가에 서서 비상식량으로 넣어 두었던 사과 1개를 꺼냈다. 정말 꿀맛이다. 이 꿀맛 상상이 되는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산속 길가 한편에 배낭을 멘 채로, 비를 맞고 선 채로 한입 베어 문 사과의 알싸한 맛을... 이건 먹어본 사람만 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사과... 비 오는 날 20km 걷고 비 맞으며 먹는 사과!


이때 뒤에서 비틀거리며 오던 아가씨가, 자신도 힘들어 보이건만, 나에게 "괜찮아?"하고 물어온다. "내 배낭 그냥 너 가질래?" 했더니, 자기 배낭도 감당이 안 된다며 "No Way!"하고 살짝 윙크해 주고 간다.


목적지 2km 남았다. 빨리 가서 숙소에서 쉴까? 아니면 10km 전부터 참아온 커피를 한잔하고 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마침 주유소 옆에 식당이 하나 보여 뛰듯이 들어갔다. 수제 햄버거와 커피를 주문하고 휴대전화도 충전하고 옷도 말리고... 숙소에 늦게 도착하면 시에스타에 걸려 점심을 못 먹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커다란 햄버거가 내 눈앞에 있다. 참 그러고 보니 스페인 와서 처음 먹어보는 햄버거다.


햄버거는 종이에 묻은 소스까지 핥아먹었다. 커피를 마시고 한참을 기다려도 비가 그치지 않는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택시를 불러 타고 간다.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바라보다 하늘을 보니 비가 그칠 태세가 아니다. "에이 그냥 가자!" 그런데 다리가 심술을 부린다. 이놈의 다리는 한 번 쉬면 다시 걷기 싫다고 항상 강짜를 부린다. 더욱이 조금 전 브라질 순례자들이 택시 타는 걸 봤으니 "나도 택시 타고 싶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걷기 싫다는 다리를 살살 달래 가며 출발하였다.

비가 엄청 쏟아졌다. 어쩔 수 없이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스틱도 접어서 배낭에 매달고, 산책 가듯 천천히 사부작사부작, 두 손은 호주머니에 꽂고 꼼지락꼼지락 하며 산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작은 마을 ‘암바스메스타스.’ 이 마을 유일한 호텔은 편안하고 안락했다.

오늘의 숙소. 산골 마을 유일한 호텔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K-드라마의 왕 팬 이셨다. 나는 피곤한데 방은 안내할 생각이 없이 한국 이야기만 계속한다. 질문 리스트를 1번에서 10번까지 미리 적어 놓은 듯, 시험 보듯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합격했는지 그제야 방 열쇠를 건네준다.


이곳은 산 정상에 있는 오래된 마을 ‘오 세브레이로’를 올라가기 전 산 아랫마을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발카르세’ 강과 ‘발보아’ 강이 만나는 합류점에 순례자들을 위해 형성된 아주 작은 마을이다. 나는 이 산속 마을에서 하루 밤을 묵어갈 예정이다. 샤워를 마치고 장비 정비를 마치니 어둠이 내려왔다.


호텔 아래층에서는 포도주의 시큼한 냄새가 흘러오고, 포도주 향에 섞여 순례자들의 포크, 나이프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는 창밖에는 들어오는 제법 세찬 빗소리와 계곡 물소리에 합쳐져 온 가게 안을 굴러 다녔다. 잠시 고민하다 저녁 먹기를 포기하고 방으로 올라가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그런데 인터넷이 안된다...


https://youtu.be/_iw6wGuqk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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