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28)
2024년 5월 16일 목요일 (27일 차)
산속의 축산마을 '라 라구나'
오늘은 1,330m 산 정상에 있는 ‘오 세브레이로’까지 가기로 계획된 날이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시간 나는 대로 이 마을에 전화를 돌려도 모든 사립 알베르게에 남은 침대가 없다는 대답뿐이다.
이제 마지막 방법은 선착순으로 들어가는 공립 알베르게를 노려야 한다. 현재 600m 위치 ‘암바스메스타스’에서 정상까지 올라가는 건 큰 부담이 아니었으나 며칠간 내린 비로 올라가는 길이 진흙탕이고 매우 미끄럽다고 호텔 주인이 귀띔해 준다. 일단 정상 바로 아랫마을 ‘라 라구나’ 마을에 침대 하나를 확보하고 출발한다.
포기는 항상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무리하지 말고 시나브로 올라가자! 다른 순례자들은 오 세브레이로의 공립 알베르게를 목표로 하였고 선착순에 들기 위해 서둘러 출발했다. 심지어 어떤 순례자들은 숙소가 없다면 정상을 찍고 산에서 내려가다 침대가 나오는 마을까지 가겠다는 각오로 출발했다. 생각과 판단은 성격을 닮고 형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겸손 모드로 그냥 천천히 가 보기로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73세 ‘데니스’를 다시 만났다. 데니스는 정상에 있는 알베르게에 자리를 구하지 못해 오히려 산을 넘어 산 아랫마을까지 갈 예정이라고 한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허리도 구부정하고 늘 힘겨워하면서도 말이다. 며칠 전 ‘산 마르틴’의 숙소에서 처음 만난 이후 길에서 가끔 만날 때마다 친형처럼 인생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출발하고 얼마 걷다 보니 ‘베가 데 발카르세’ 마을이 나온다. 산중 마을치고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원래 계획은 이곳에서 아침을 먹으며 어젯밤 업 로드하다 실패한 유튜브 동영상 작업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문 연 카페가 없다.
너무 이른 아침 이어서 그런가? 포기하고 다음 마을로 넘어가는데 중년 부인이 지나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기 아래 카페는 언제 문 열지?"하고 물어보니, 자기가 그 카페 종업원인데 지금 출근 중이라고 한다. “너 따라가면 아침 좀 줄래?” 그리고 오렌지 주스와 커피, 토르티야가 내 식탁에 배달되었다. 물도 한 병 추가로 사서 배낭에 넣었다. 함께 나온 바게트 몇 조각은 휴지에 싸서 바람막이 점퍼 주머니에 넣고 출발한다.
"한번 해 봐! 안 되면 말고!" 우리 아이들 어릴 때 자주 외쳤던 우리 집 구호다. 오늘도 이 구호가 제대로 먹혔다. 안 된다고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뭔가 시도해 보자. 안되면 말고...
까미노를 걷다 보니 앞 뒤에 아무도 없다. 이렇게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가 가장 두렵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혹시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다. 앞에 순례자가 있으면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굳이 지도를 꺼내 볼 필요도 없이, 그저 단순하게 뒤를 따라가면 되기에 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그 앞선 순례자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면, 뒤따라오는 많은 순례자들도 순식간에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리더십은 단순히 조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앞서나가며 다른 이들에게 길을 제시하고, 따르는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조직 내에서 리더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결국 리더십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과도한 욕심에 빠른 속도로 승부 보려는 잘못을 억제하고 정확하게 방향을 제시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며 확신을 갖고 앞선 행동으로 솔선수범이 되어야 한다. 순례길에서 앞서가는 사람을 보며 여러 번 느낀 나의 소감이다.
나의 직장생활을 되돌아보면, 각 조직에서 리더의 역할과 책임은 정말 중요하였다. 직원들은 앞서 있는 리더의 등만 보고 따라간다. 그래서 리더십과 리더로서의 책임이 무한함을 느끼게 된다.
스페인 부인을 졸라 아침 먹고 물까지 사 오기 정말 잘했다. 다음 마을에 도착해 보니 여기는 작은 마을이어서 아직 문을 연 카페가 하나도 없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아랫마을에서 아침을 해결하지 않고 왔다면 산을 오르는 내내 참으로 힘든 여정이 되었을 것이다.
작은 도로를 따라가던 까미노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길은 온통 물먹은 진흙 길이고, 경사도 제법 되는데 비는 점점 더 많이 온다. 오늘 아침 호텔에서 나올 때 모든 옷가지를 어제 구해 온 비닐로 한 번 싸서 배낭에 넣고, 배낭을 레인 커버로 다시 덮고, 그 위에 판초 우의로 다시 덮었다. 이 정도 했으니 배낭 안에 있는 물건들은 안전하리라. 다만 내 팔과 얼굴, 어깨와 다리는 온통 비를 맞아 제법 추위가 몰려왔다.
아까 오스트리아의 데니스와 함께 걸으면서 우리는 이곳 순례길의 허술한 인프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년 수십만 명의 순례자가 찾는다는데 충분한 인프라가 제공되어 있지 않다. 간이 화장실 부재나 부실한 인터넷, Wi-Fi는 그렇다 치고, 알베르게 예약 시스템은 평점 O 점이다. 완벽한 편의 시설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매일 순례자들이 숙소와 침대를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농촌 소멸은 큰 문제인 것 같다. 대부분의 시골 마을은 거의 폐허나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오직 몇 가구만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고, 각 마을을 지날 때 그 마을 사람 보기가 귀하다. 대부분 집은 문을 걸어 잠그고 도회지로 나간 듯하였다. 이곳에 순례자마저 지나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순례자들의 가치는 단순한 경제적 가치 말고도 시골 지역의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힘들게 오르고 올라 920m ‘라 파바’ 마을에 도착했다. 몇 시간을 비 맞으며 산길을 올랐더니 무척 힘들었다. 등산로가 진흙으로 되어 있어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미끄럽고 발도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 되어 누구나 힘들었으리라.
그런데 마을에 도착하니 포장도로가 보이고 자전거를 탄 순례자들이 지나간다. 앵? 조금 있으니 이제는 말을 탄 순례자 무리가 올라가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조금 편하게 올라오는 차도가 있었던 것이다. 말을 탄 순례자들은 유료로 이용하는 서비스라고 한다. 미리 알았으면 이거 이용했으면 좋은 경험이었겠다 싶었다.
마을에 정말 작고 예쁜 카페가 하나 있었다. 벽난로에는 장작이 불타고 젊은 청년이 커피를 내리고 있다. 커피도 맛있고 삶은 계란은 허기를 채우기 딱 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옷도 말리고, 땀도 식히고 다리도 좀 쉬어 간다. 이곳에 머물다 보니 많은 순례자들이 비 맞은 모습으로 들어와 모두 벽난로로 달려간다. 이제 고도를 300m만 올리면 된다.
마지막 산길을 올라간다. 숲길을 오르며 이런 산중에 무슨 알베르게가 있을까? 식당이나 제대로 있을까? 오늘 피곤하고 힘든데 먹을 것이나 제대로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나 배고파요. 오늘 저녁에 스테이크 하나 주시면 안 될까요?"
잠시 후 가쁜 숨을 내쉬며 '크리스'가 올라온다. 우리는 분명 인연이 있나 보다. 서로 얼굴을 보면 웃었지만 말할 기운도 없어 그냥 웃기만 했다.
산을 오르다 보니 몇 가구뿐인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목적지에 도착한 지도 모르고 계속 산길을 올랐다. 그러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되돌아가보니 ‘라 라구나’ 마을이 아닌가? 자칫 큰 실수를 할 뻔했다.
화강암으로 건축된 숙소는 제법 큰 규모였으며 침대도 많았고 마치 대관령 어느 콘도에 머무는 기분이 들었다. 몇 가구뿐인 동네 집들은 모두 축산농가로 보이고 마당에는 송아지만 한 개들이 돌아다니는데 조금 무서울 정도이나 이 개들은 소를 목초지에 몰고 가는 소몰이 개라 사람에게 친근하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식당에 들어가니 비 맞은 순례자들이 와인을 마시느라 한창이다. 비에 젖어 식당에 들어온 나를 모든 사람이 동시에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무슨 마라톤 우승자가 된 기분이다. 이런 환영받는 게 쑥스럽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함께 즐기며 이야기 나누고 순례자 메뉴를 시켜 점심으로 먹고 이른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병아리콩 수프와 올라오면서 기도 했던 대로 스테이크가 나왔다. “오늘 소고기가 좋아 순례자 메뉴는 스테이크로 준비했어요.” 갑자기 멍해졌다. 내 심정을 물 떠 온 하인만 알 것이다. 오늘 내가 스테이크를 어떻게 먹게 되었는지···
우리 마음의 소원이 거룩하다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행동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는 스테이크가 먹고 싶었고 오늘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풍성한 점심을 제공받아 저녁을 건너뛰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지 유리창이 시끄럽다. 같은 방에 있는 한국 아주머니, 청년들, 인도인 부부 그리고 미국 할아버지……
모두 코를 골면서 기분 좋게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