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자마자 또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이놈의 과민성대장증후군은 언제쯤이면 사라질지….
중요한 날이나 신경이 곤두서는 날이면 영락없이 사르르 사르르 복통이 시작되고, 십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쪽팔리는 순간이 십 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제껏 손해 본 일이 한둘이 아니다.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 한 중요한 시험들은 물론이고, 그와의 첫 데이트도 이놈의 증상 때문에 낯 뜨겁게 망쳐버렸다. 데이트 중간중간 화장실에 들어가 안 나오는 여자에게 무슨 성적 매력이 있어 그는 나와 시작했을까?
그런데 나는 오늘 아침 그와 헤어졌다.
새벽 여섯 시부터 카톡으로 싸우다가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하면 끝내자….’하고 그가 먼저 말했다.
이제껏 내가 그렇게 지랄지랄 결별을 통보해도 끄떡없었던 그가 먼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무조건 마지막이 분명할 것이다.
그는 그동안 내게 미래를 꿈꾸게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대학 4학년 때 만나 피차 가볍게 시작한 연애였지만 드물게 점점 좋아지는 사람이었고, 세월이 흐르자 생각지도 않게 관계의 무게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둘 다 적당히 평범했고, 보통보다 조금 똑똑한 20대였다. 졸업을 앞두고 잠을 쪼개 취업 준비를 했고, 그 덕에 둘 다 비교적 탄탄한 중견기업에 입사했다.
입사한 첫해가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다. 먹고 싶은 걸 주저하지 않고 먹을 수 있었고 근사한 호텔을 예약해 여행도 다녔었다. 주고 싶었던 선물을 살 수 있었던 그때 우리는 세련된 대도시의 커플이었다.
나는 결혼자금이니 아파트니 하는 골치 아픈 것들은 미뤄두고 오늘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슬슬 눈치를 보면서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분명히 서로를 원했고,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사이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결혼은 현실적으로 너무 구질구질했다.
지난달 미정의 결혼에서 나는 한번 더 깨달았다. 나보다 공부도 그저 그랬고 얼굴도 별로였지만 미정이는 돈으로 당당하게 강남에 입성했다. 나는 적어도 내가 그런 것에 주눅 들 거란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별수 없었다.
‘역시 니 수준이 그렇지….’라는 소릴 들으며 후지게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만은 그랬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에게 동거를 제안했다. 둘이 살고 있는 작은 오피스텔을 합쳐 방 두 개짜리로 옮기고 일단 우선 시험 삼아 살아보자고 했다.
“뭐하러 동거를 해. 그냥 결혼하면 되잖아.”
그는 그렇게 주저하는 내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늘만큼은 짐짝처럼 실려 가는 지하철이 싫어 그대로 뛰쳐나왔더니 아직 열차 안은 한산 했다.
당산, 신도림, 낙성대, 사당…. 그와 보냈던 따뜻한 장면들이 역의 정차에 맞춰 천천히 다가왔다 흘러가고, 다가왔다 흘러가기를 반복했다. 복통의 강도도 그 흐름에 따라 가라앉았다 심해지기를 반복했다.
아직 사무실이 위치한 역삼역까지는 두 정거장이 남았지만 나는 마침내 참을 수 없어 배를 쥐고 내렸다. 땀이 삐질삐질 나고 화장실을 찾아가는 길까지 열 번은 멈추어 괄약근을 조절했다. 화장실 표지판이 보이자 정신없이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다급했던 나의 생리현상도 멈췄다.
여자 화장실 안에 그들이 있었다. 서로 입을 맞춘 채….
가슬가슬 부서질 듯 흘러내리는 빈약한 머리카락을 가진 색 바랜 푸른 청소복을 입은 초로의 여자와 같은 복장을 한 비슷한 연배의 남자가 부둥켜안은 채 키스하고 있었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그 키스는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애잔했다. 분명 오래 벼른 듯, 조심스러워 보이는 그들의 행위는 그 순간 세상을 통틀어 둘만 존재시키듯 강렬했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들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뒤돌아 나를 발견하자 민망함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주름진 볼에 발그레한 홍조를 목격한 나는 먼저 목례를 하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주책이야.”여자가 남자에게 핀잔 주는 소리가 문밖으로 들렸다.
“어때....”
뒤이은 남자의 목소리엔 설렘이 가득했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잠시 후 나는 그의 카톡창을 열었다. 함께 찍은 프로필사진이 사라져 버렸다.
타인임을 선언한 그 창이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울고 싶었지만 그저 가만히 화장실 앞을 지키고 섰다. 그들의 굿모닝 키스가 끝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