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을 눈앞에 둔. 오랜 산 여자가 그날 오전 기차역에 나타났다.
검은 바지에 조그만 도트 무늬의 자주색 점퍼, 지루하디 지루한 색감이 특색인 늙은 여자의 그저그런 패션이다.
그리고 아마 난생처음일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는 표정이다. 들떠 보이고 긴장이 서린 얼굴은 부모와 떨어져 첫 수학여행을 앞둔 여중생의 그것과 과히 다르지 않다.
이제 막 초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는 따뜻한 기온, 살짝 굽은 등에 작은 배낭을 멘 그녀가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핫초코 한잔을 홀짝거린다.
‘무서울 게 없는 나이인데 뭘...’
마시는 내내 중얼거리며, 연신 만지작거리는 주머니에는 작은 메모지 한 장이 숨어 있다.
목적지까지는 그저 기차로 두세 시간 남짓, 그녀가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다도시로 향하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가본 지가 삼십년 전이던가 아니면 삼십이년 전이던가….
떠나올 땐 해마다 갈 것 같았지만 세월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울로 온, 몇 해 뒤 갑자기 남편이 아프자 연락이 어려웠다.
그러다 결국 허둥지둥 남편을 떠나 보내고, 겨우 그 상처를 싸매어 일어서자 이번에는 자식이 쓰러졌다.
그쯤 되자 행여 그곳에서 먼저 연락이 올까 두려워졌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나온 곳인데 편치 않은 모습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가끔 생각나도 ‘언젠가…’ 하면서 그곳을 멀찌감치 미뤄두었다.
그렇게 있는 힘껏 자식을 보살펴 한고비를 넘길 무렵 이번에는 여자에게 뇌졸증이 찾아왔다.
피씩 웃음이 샐 정도로 어이가 없었지만, 악착같이 병과 싸워 후유증 없이 회복하는데 또 몇 년이 흘러갔다.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고….
아무리 인생길이 ‘생로병사’라지만 사람은 아프지 않고는 살아갈 길이 없는지 참 지긋지긋했다.
물론 사이사이 빼꼼했던 시간도 있었겠지만, 공기 속을 휙 떠돌고 마는 연기처럼 그 시간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대신 지난 수십년 그저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같은 기억만 남아버렸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넘어져 있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서 오늘을 맞이했다.
드디어 편안한 시간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누구의 시중도 들지 않고….
아니, 제아무리 무슨 일이 일어난다해도 별 대수롭지 않은 시간이 그녀 앞에 당도한 것이다.
점심 나절 기차가 멈추자 여자가 그 익숙한 곳에 낯선 시선을 한 채 내려섰다.
몰라볼 만큼 변했지만 그래도 그곳이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그제야 주머니 속에 숨겨놓았던 메모지를 꺼내 본다.
그리운 이들이지만 휴대폰 연락처에 그들은 없다.
조심조심 한사람, 한사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 시작한다.
A는 치매로 요양원으로 옮겨갔다. 그럴 수 있겠다.
P는 이년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버렸는데 몰랐냐고 되묻는다. 그리될 수 있는 나이다.
L은 연락처가 바뀌어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겠지, 너무 시간이 많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Y의 연락처만 남자 그녀의 콧등에 작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아무도 못 만날 수 있다고 짐작한 길이었다.
그저 혼자서도 걸었던 거리, 살았던 집을 찾아 어찌 변했나 살펴보면 그만이라 마음먹었었다. 그래도 짱짱했던 시절의 장면과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의미는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꽤 오랫동안 통화가 이어진다.
두어 시간 뒤 해질녘 바닷가, 무난한 숙소 앞에 간편한 복장의 그녀가 나타난다.
친숙한 모래, 어슬렁거리는 개들, 갈매기 떼 그리고 비슷한 연배의 노인과 그 곁을 뛰는 아이가 보일 뿐….
특이한 풍경은 없다.
그런 해변을 잠시 보는 듯하더니 그녀가 그대로 선 채 능숙한 스쾃 자세를 잡는다.
천천히 저물어 가는 해질녘 바다를 향해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완벽한 스쾃은 멀리서 보면 수도승의 구도 자세처럼 엄숙하기 짝이 없다.
그때 “영선아….” 하고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른다.
Y다. Y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지팡이를 짚고 아들의 팔에 의지한 채 환하게 웃으며, 그리운 늙은 여자가 걸어온다.
그녀는 Y를 보자 잠시 손을 흔들고, 여봐란듯 멈췄던 스쾃을 더 열심히 한다.
‘그래,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았어.’
저멀리 해가 바다 저편으로 꼴딱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