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의 규정과 담론의 왜곡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0년대 서구에서 인권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소수자들을 위한 논리로 나온 것이 이 정치적 올바름 소위 PC (Political Correctness)다. 그러던 것이 90년대부터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반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회에서 어떤 반동이 나오면 기존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반작용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충돌에서 보통 양 진형은 본인들이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옳고 그름의 문제로 프레임을 형성한다. 정치적 올바름의 이슈도 그렇게 진행됐다.
사회적 소수자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발생한 개념이다. 민주주의가 안착하기 이전의 전근대와 근대 사회에서 차별은 정당화됐다. 이 시기에는 권력을 소유한 자들이 그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사회 안정화를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서는 단일한 정서와 질서가 있어야 했다. 여기서 활용된 것이 종교과 관습이다. 이들의 특징은 어떤 반론의 여지가 붙을 수 없다는 거다. 즉 이전의 사회에서 차별이나 그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소수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사회적 담론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근대와 현대의 민주주의는 사실 신생 권력자들이 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차용한 장치지만 한 번 사회에 안착하고 난 다음에는 자생하기 시작했다. 이 사상이 사회에 더 '만연'하기 시작하면서 더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목소리를 냈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여러 기술들의 활용에 힘입어 각 개개인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이전에는 다뤄지지 않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당사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반감을 가지는 것은 비단 기존 체제에서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계층들만은 아니다. 이전 체제는 관습화 되고 이 관습은 대다수의 일반 대중도 학습하기 때문에 변화가 개개의 삶 속의 '소중한' 가치를 뒤흔드는 위협 요소로 치부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런 변화에 대한 반감은 종종 사회 소외계층에게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기존의 질서에 적응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기존 질서가 변화하는 것에 매우 큰 반감을 갖는다.
한국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특히나 젠더이슈와 함께 등장한다. 젠더이슈는 한국에서 수면 아래 내재돼 있는 화약고 같은 이슈다. 사실 한국에서 최초의 젠더 논쟁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20여 년 전부터 갑론을박이 있어왔던 군 가산점제가 바로 그 시초다. 이 논쟁은 한국의 분단 상황과 맞물려 굉장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하지만 실제 논의의 영역에서 다뤄지게 됐을 때 많은 부분들은 거세된 채 그저 평등과 불평등의 싸움이 됐고 결국 성별 간의 감정 다툼이 됐다.
이후에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될 때는 항상 기저에 깔려있는 감정에 기반한 양극단 간의 충돌 양상으로 이어졌다. 물론 감정싸움이라고 해서 각자의 논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논리를 바탕으로 본인의 지위를 '옳음'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 논쟁은 옳고 그름의 싸움이 됐다. 이렇게 지형이 짜이면 이 논의 자체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는데 다양한 의견들이 각자의 잣대에 따라 옳고 그름으로만 분류되기 때문에 수용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것이 그 이유다. 또 양극단의 견해가 논의의 바탕을 이루고 있어서 조율할 수 있는 여지도 좁다.
최근 몇몇 게임이나 영화 등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받았다. 다인종적 요소가 들어있거나 캐릭터의 외모, 특히 여성 캐릭터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거나' 동성애 연출이 들어있는 부분들이 비판의 내용이었다. 사실 해당 컨텐츠들은 작품성이나 다른 부분에서 이미 문제점들이 드러났던 상황이었는데 비판 상황이 지속되는 와중에 앞선 지적 사항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작품에 대한 비판 요소들로 거론됐다. 몇 가지 사안들이 이미 ‘나쁜 것’인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규정되고 이 간판으로 여기에 ‘딴지’를 걸면 나쁜 것을 옹호하게 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사안이 정치적 올바름의 주제로 규정되는 순간 대화의 여지는 사라진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담론은 주로 온라인에서 다뤄진다. 스마트폰의 보급 확대와 더불어 온라인 접근 연령층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이 영역에서 트렌드와 이슈를 선점, 선도하는 세대는 10, 20대이다. 특히 20대는 '정의'에 민감한 세대다. 자본 소유에서 가장 배제된 세대로 사회적 최약자층이지만 사회 영역에서 가장 외면받는 세대이기도 하다. 때문에 생존에 가장 민감한 세대고 따라서 편법과 특혜와 같은 불의에 가장 적대감을 크게 갖는 세대다.
불의와 부정은 매우 명확하게 판가름 나는 가치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에서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정확한 상황 파악과 사회를 구조적으로 분석해야 이를 구분 지을 수 있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이 이런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정보를 얻는 주요 루트 역시 온라인이고 이 온라인에서 소위 요약, 정리된 팩트는 취득할 수 있지만 관련된 복합적인 정보나 분석은 제대로 얻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최근의 언론 지형에서는 온라인에게 자리를 내준 기성 미디어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결국 토막 난 팩트로 상황을 인식, 판단해야 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모든 계층에서 이런 부족한 정보로 인한 부정확한 상황인식이 종종 여론 조사들을 통해 드러난다. 물론 대부분의 사안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추가 정보들이 유통되면서 바로 잡히긴 하지만 어떤 사안들은 그렇지 못한 채 사회적으로 정리가 된다. 특히 정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진 20대의 경우 더욱 확고한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은 '옳은' 결정이기 때문에 이들은 공격적이고 타협이 없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의 영역으로 엮이는 인종, 젠더, 성 정체성의 이슈들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특히 현재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우리의 인식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 분야의 문제들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규정이 아니라 이해가 필요하다.
이해와 기준의 확립을 위해서는 복잡 다단한 구조의 담론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이미 정치적 올바름은 온라인의 영역에서 단순화되어 규정되고 소비되고 있다. 온라인에서의 담론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트렌드에 민감하고 소비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내용이 편집되어 전달되고 결국 사안에 대한 이해를 저하시킨다. 이는 온라인에서의 정보 전달이 시각화, 특히 영상화가 되면서 더욱 심화되는 현상이다.
온라인에서의 담론이 갖는 또 다른 취약점은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목소리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처럼 정의가 명확하지 않고 추상적이며 옳고 그름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논쟁일수록 특정 세력의 목적에 따라 논의가 대중의 의견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게 '조작'될 수 있다. 여기서의 조작은 대중의 의식과 관련이 없는 담론이 만들어져서 유통된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견해가 침소봉대되어 전체 담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나 관련 분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관심이 덜한 구성원들의 경우는 오고 가는 논의를 보면서 자신의 견해를 결정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 조작적 개입은 그 악영향이 크다.
사실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연령층인 20대 청년들과 사회적 소수자 운동의 대표 격인 여성인권 운동이 격돌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이 두 세력 간의 극심한 불신은 앞서도 설명했던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사안을 다루면서 벌어진 일이지만 사실 핵심 원인은 정치권이나 사회 운동의 영역에서 이런 감정과 견해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능력의 부재다. 거기에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촉발된 여성인권 운동에서 극단 주의적 주장을 하는 세력들을 정리하지 못한 부분과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보여준 우유부단한 모습은 지금의 현실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차별의 문제는 역시 사회적 영향력이나 부를 재분배해야 하는 영역의 것이고 이는 기성 권력층의 강력한 반대를 무마시킬 정도의 힘, 즉 연대를 통해 형성될 수밖에 없는 힘으로만 이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