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면체를 그릴 때에도 철학이 적용된다

by 박모카

집에 있던 아무 연필을 들었다. 3,000원짜리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처음으로 뎃생이라는 것을 시도해보기 위해서였다. 스케치를 정밀하게 해보는 활동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전에 구를 그릴 때에는, 선생님의 4B연필을 빌려서 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무 연필이나 쓰니 작은 연필 똥이 스케치북에 묻어서 스케치가 지저분한 느낌이 들었다.

연필에 급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선생님에 의하면, 4B연필도 브랜드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한다. 선생님은 조금 묻어나오는 것이 덜 한 편인 톰바우 연필을 선호한다고 하셨다.

나도 4B연필이 하나는 필요하겠다 싶어서 집 앞 어디선가 아무 4B연필을 골라 샀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톰바우에서 나온 제일 고급진(800원짜리와 2,200원짜리가 있었는데 2,200원짜리로 사봤다. 더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이 드는 것이 정말 퀄리티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연필을 사서 써보니, 연필도 정말 나름대로 개성이 있구나 싶었다.

어느 문방구 덕후는 연필에 쓰인 나무 재질에 따라 무게감이 결정된다고 한다. 누군가는 세계적인 소설가, 미술가, 음악가가 사랑했던 브랜드의 연필을 고집한다. 놀랍게도 실제로 연필만 파는 가게가 세계 곳곳에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몇 군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경악했다.

나에게는 아주 작고 사소한, 도구로서의 역할만 했던 무언가가, 누군가에게는 철학이 들어가있는 소중하고 특별한 보물이라는 것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육면체를 그리는 방법은 구를 그리는 방법보다 쉬웠다.

각이 져있어서, 빛의 세기가 좀 더 드라마틱하게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형만 그릴 뿐이지만 미술이 너무 재미있다. 선생님이 부족한 준비성이 처음에는 싫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오히려 불량 선생과 이상한 제자가 만나서, 제자가 그 분야에 진심이 되며 성장하는 드라마의 이야기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에는 불편하거나, 일상적이었던 대상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신비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철학을 듣는 활동은 매우 즐겁다. 아래는 선생님이 알려준 사실화를 그리는 법이다.

이전에 구를 그릴 때에는 빛에만 신경을 써서 그렸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신경 쓸 항목이 추가되었다.


1. 사물을 최대한 똑같이 그려본다. 눈으로 보고 그리는 것이 초보자에게는 추천된다. (말은 이렇게 해도 완벽하게 예쁜 빛을 그려야한다. 단, 초보자는 상상으로 그리기 어렵기 때문에 눈 앞에 물체를 두고 그리는 것이 좋다.)

2. 그 다음, 같은 사물 내에서도 나랑 가까운 것은 가깝게, 먼 것은 희미하게 라인을 잡는다. 또, 강조되는 부분(아주 어두운 부분 등)에 강조를 해둔다. 위에서 본 물체면 형상에 왜곡이 있는 것을 감안하여 그린다. 약간 과장이 필요하다.

3. 강조했던 모든 것을 한 곳만 빼고 모두 지운다. 사실적으로 그리는 활동이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 사실은 다르다. 그리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어찌 보면 그리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디를 중점적으로 생각했는지 등을 볼 수 있다. 사실, 간단한 그림도 비싸게 팔리는 이유가, 이런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은 심플하게 나타나지만 그리는 과정에 있어서 아주 많이 지우고 (어두운 부분을 여러군데 표현했던 것을, 마지막에는 강조점이 하나만 되도록 모두 옅게 지워주는 등. 처음부터 옅게 칠하면 자연스럽지가 않다.) 다시 그리고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선생님께서 그림 마무리를 도와주셨는데, 작품이 탄생했다. 뿌듯한 것 보다 재미있는게 더 컸다. 정말 강조점을 하나만 남기고 모두 지워주니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마법에 걸렸다. (이것을 알고 나니, 이젠 눈으로 봤을 때랑 똑같이 그리면 신기하게도 뭔가 어색해보인다.) 사실이 아닌 것이 더 사실적으로 보이는 마법이 너무 재미있고 신기했다. 뱃속의 아기한테도 알려주고 싶어 질 정도로 귀한 정보였다.


나는 사실 뭔가를 똑같이 그리는 것은 잘하는 편이다. 여태 그 재능을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떠올랐다. 미술의 세계는 정말 재미있고 나름의 철학이 매력적이다.


사실화를 그리는 사람은 실제로, 눈 앞에 내가 보는 모습과 조금 다르게 그린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신기한 세계였다.

그리는 사람의 주관이 들어가서, 그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가 투과되는 과정이라니!

나는 여태 세계 여러 박물관을 돌아다녔어도, 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몰랐던 것도 함께 깨달았다.

여태 신기한 기교나, 예쁜 색을 보면 가까이서 보며 예쁘다고만 생각했을 뿐,

화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법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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