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빨의 대가는?

by 박모카

뎃생을 몇 번 해보니, 이제는 수채화를 사용해보는 시간이 돌아왔다.

기존에 4B연필로 뎃생을 해놓고, 그 위에 수채화로 얹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이 뜻을 이해했다. 수채화는 한 번 그리고 나면 수정이 어려운 놈인데, 초보자는 빛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리 가이드라인을 잡아놓고 그려야 한다. 머릿속으로 구도를 잡아놓고 그리다보면 머릿속에 있던 것을 까먹게 되어서 나중에는 수정하기 힘든 색칠로 마무리된다. 그 위에 덮고 덮다보면 탁해지기도 하고.. 여튼 초보자는 가이드라인으로 뎃생을 미리 해놓는 것이 필요하다. 나중에 수채화를 얹으면 어두워보일까봐 싫었는데,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 그런데 수채화가 그라데이션이 전혀 안되었다. 나름 섬세하다고 자부하는 내 손인데, 아무리 초보라도 이렇게 조절이 안되다니.. 충격이 컸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시려고 오셨는데 선생님도 종이에 금을 그어버리고 말았다. ㅋㅋㅋ

종이가 못 받쳐주는 것이라고 하는 말이, 꼭 변명같이 느껴졌다.

실력이 있으면 장땡아닌가? 장비탓하는건 초보자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종이가 좋으면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해도, 처음부터 너무 쉬운 방법으로 뭔가를 하기 보다는 조금 더 어렵게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후에 실력이 느는 속도가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30장에 3,000원하는 스케치북 위에 물감을 계속 얹었다.


하지만....

종이 차이가 너무 크고, 지금 종이는 못 쓰는 수준이라는 말(어린이집에서 많이 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스케치북은 물을 조금만 얹어도 금방 쭈글쭈글해지거나 물감이 0.5초내로 빨리 말라버려서 그라데이션이 불가능하다.)에, 비싼 종이를 사봤다.

수채화용 종이는 셀룰로오스로 만드는 종이와, 코튼이 함유된 (고함유일수록 비싸고, 25%~100%까지 비율이 올라간다.) 아이가 있다. 셀룰로오스로 만드는 아이는 곰팡이 등에 강하지만 물을 머금을 수 있는 능력이 코튼에 비해 떨어져서, 그라데이션이 살짝 부자연스러울 수 있다.

반면 코튼이 많이 함유될수록 보관 등이 어려울 수 있지만 그림을 그릴 때에는 물을 많이 머금을 수 있어서 더 쉽게 그릴 수(그라데이션이 쉬워진다고 한다)있다고 한다.

셀룰로오스로 만든 종이는 A3크기 한 장에 천원~이천원꼴로 살 수 있는데, 코튼 함유된 아이들은 동일 크기에 이천원~사천원 꼴에 판매된다. (종이는 1+1행사가 많다고 한다. 그것이 반영된 금액을 적었다.)

비싼 종이는 나중에 작품을 그릴 때 사기로 하고, 일단은 쓸 수 있는 종이에서 가장 저렴한 친구로 골랐다.


물감을 얹어보니 확실히 다르긴 하더라..

이번 종이에 그린 파란색 네모 수채화는 선생님께서 잘그렸다고 칭찬해주셨다.

빛도 이상하게 그렸는데(가이드라인으로 뎃생을 해놓으면 그림이 너무 어두워질까봐 뎃생을 눈에 잘 안 보일 정도로 아주 살짝만 해놓고 물감을 칠하다가, 내가 표시해둔 부분을 나도 못 보고 반대로 칠했다.) 하나도 안 어색하다고 하셨다.


경험하고 나니.. 전설처럼 들려오는 '반고흐는 종이값을 벌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와 같은 이야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그들은 가난했던 것이 아니다. 미술 자재 값이 너무 비쌌던 것이었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는 사람으로서도 미술은 사치스러운 취미라는 것을 이제야 느꼈다.


연필만 좋을 것을 쓰면 될 줄 알았는데, 지우개도 전문가용을 써야하고 (뎃생할 때 물렁한 전문가용 지우개로 팡팡 두두려주면 톤이 자연스럽게 밝아진다. 연필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기술이라서 지우개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감을 사용하려면 종이도 좋은 것으로 써야한다. 이 세가지가 기본 필수품인 줄 알았지만..


20년 전에 사용하던, 다 휘어져있는 붓으로 그림을 그려보다가 선생님의 탄력있고 크기도 적당한 붓을 써보니 또 다시 신세계를 느꼈다. 당근마켓에서 새 붓을 샀는데, 사실 새 붓이 아니었다. 새 붓이 이렇게 탄력이 없고 갈라져있지는 않을듯.. 그래서 입문용으로 괜찮다는 화홍 붓 몇개와, 알리바바의 중국산 붓 여러개를 새 상품으로 붓을 구매했다.

가장 많이 쓸 것 같은 붓만 붓집에 넣어두었다.

물통은 집에 있는 플라스틱 통에 담아 썼는데, 물통이 하나인것이 번거로워서(물이 금방 탁해진다. 새 물이 필요해..) 칸이 4개로 나뉘어 있는 아이도 구입했다. 5,000원 미만으로 저렴해서 구비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술실에서 연습을 하려고 했는데, 주민센터에서 수업 외 사용은 불가하다는 말을 듣고, 집에는 없는 이젤(화가 하면 떠오르는 네모난 스탠딩 받침대)도 사버렸다. 바닥에 놓고 그리면 전체적인 그림이 안보여서, 지역적으로만 그리게 된다. 그래서 그리다가 자주 들어서 봐줘야하는데, 이젤이 있으면 편하다. 이젤을 써보면 왜 이젤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 편하다의 문제보다는 필요하다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이젤이 없을 때에도 잘 살았지만, 한 번 경험해보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젤의 세계..


장비 중, 이젤에 부착한 종이가 무거워지니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다이소에서 저렴하게 산 펜시용 마스킹 테이프가 전혀 듣지 않는 다는 것을 (다이소의 마스킹테이프는 저렴하지만 접착력이 부족해서 잘 떨어진다. 아무래도 다이어리 꾸미기 용으로 나온 것이라, 접착력이 아주 약하게 나온 것 같다.) 발견했다. 그림을 그리다가 툭툭 떨어지는데, 다이소의 마스킹테이프를 아무리 여러번 바르고, 길게 늘어트려 발라도 종이는 계속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테두리를 예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도 했던 그 목적은 사라지고.. 종이도 우글우글하고.. (원래는 마스킹테이프가 빳빳하게 잘 버텨주기도 한다.) 그래서 마스킹테이프도 일반 미술하는 사람들이 쓰는 것으로 구매..ㅠ


집에 동양화 물감밖에 없었기에, (물에 풀어지는게 좀 더 약하다고 한다) 연습용으로 쓸 수 있는 신한 물감을 당근마켓에서 샀다. 이것도 쓰려고 보니 색이 빠져있는게 많았다. 없는 색은 하나씩 낱개로 구매해서 채워놓지 뭐.. 라고 생각했다가 전문가용 물감은 어떤가 싶어서 비싼 고체 물감도 구매했다. 물건을 몇 개 사다보니, 발을 담근 효과인건지 필수적이지 않은 물품도 '사는김'에 구매하게 되었다. 펄이 들어가있는 물감도 겟.. 후후

파레트까지 사기는 싫어서 물감통과 그릇을 재활용 했다. 꽤 괜찮다.

다른 물건은 모두 미술 능력을 100배로 올려준 반면, 물감은 지금 단계에서 생각보다 그렇게 좋은 것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한 물감 정도면 (2만원 안밖으로 구매 가능, 구매한 좋은 고체물감은 할인을 해도 7만원대로 샀다.) 연습하기 충분히 차고 넘치는 것 같았다. 물론 나중에 채도나 명도가 좋고 맑은 느낌의 작품을 그리고 싶다면 좋은 물감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연습 단계니 이정도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화방에 갔다가 마스킹액을 보고 구매. 사실 당장 필요는 없지만, 있으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 같아서 샀다.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는 나는 평소에 잘 쓰던 붓으로 마스킹액을 사용했더니 붓을 못쓰게 되었다. 물건을 잘 못 버리는 나는 이 붓은 버렸다. 붓 털에 마스킹액이 끈끈히 묻어서, 안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스킹액도 생각보다 빨리 말라버려서 종이에 예쁘게 표현이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마스킹액이 가리는 범위는 넓었고, 빨리 굳는 바람에 작은 덩어리씩 종이에 올릴 수 없었다.


용품을 구매하다보니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골고루 사게 되었다. 위에 적은 것 외로도, 장갑(임신하고 나니 손에 땀이 너무 많이 난다.), 물 조절용 스펀지(안입는 색바랜 흰 면 100% 티셔츠를 잘라서 걸레처럼 만들어 놓으니, 그게 더 잘 쓰였다), 예쁜 색감의 마스킹 테이프(작품에 예쁜 도구 중 하나로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립감과 심이 다른 연필 및 샤프연필 여러개(특히 메탈릭 심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실 평범한 것일 수 있는데 말이다.), 워터브러쉬 여러개(일반 붓과는 다르게, 물을 아주 많이 머금을 수 있어서 매력이 또 다르다.), 종이 샘플 여러개(코튼이 함유된 종이도 써보고 싶어서 구매했으나, 막상 사 놓으니 아까워서 못 쓰겠다. 언젠가 실력이 늘면 뜯겠지 싶은데, 그 날은 신기루같은 환상의 날일까 싶기도 하다.), 브러쉬(지우개가루를 터는 브러쉬.. 라고 한다. 이건 집어오게 된 이유가 세일해서인게 99%다.), 연필형 지우개(넓고 말랑말랑한, 톤업시키는 효과의 지우개와 또 달리, 이 지우개는 작고 소중한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주기 위한 지우개라고 한다.) 등.. 꽤 여러가지를 구매하게 되었다.


아.. 말이 다른 곳으로 샜는데, 어쨋거나 내가 물건을 사기 시작한 이유에는 '물건을 사는 것이 미술을 하는 디폴트 값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낙서처럼, 취미로 수채화를 하려고 해도, 아주 기본적으로 필요한 연필, 지우개, 종이, 붓 그리고 저렴한 물감은 필요했다. 누구나 집에 하나씩 있는, 어렸을 때 학교나 방과후 활동에서 쓰다 방치되어 10년 넘게 안고 온 미술 용품은 지금 필요한 것과 약간은 달랐다. 그리고 이런 물품은 소모품이며, 생각보다 비싸다. 미술을 시작하기 전에 알았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수 있겠다. 하지만 미술이 주는 기쁨은 그 가격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있는 지금은 이곳은 좋은 투자처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집에 있던, 그림에 적합하지 않은 용품들로 시작을 해도 되겠다는 내 생각을 조금 바뀌었다. 좋은 장비로 시작하면 그것에 익숙해져서, 내가 기본으로 할 수 있는 부분 외로 다른 시도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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