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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Jul 25. 2023

정신줄 놓기 중독

1화

-딸꾹, 딸꾹.


언제 시작된 것인지 모를 딸꾹질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무너져 내리는 눈꺼풀을 겨우 든 채 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취기를 억누르며 첫 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버스 정류장의 작은 대기판에 20분 뒤에 첫 차가 올 것이라는 신호가 보였다.


-20분만 참자


무엇인가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을 꾹 참아가며 나는 주머니 속에서 취기를 달랠만한 무엇인가를 찾았다. 음식점에서 카운터의 바구니에서 집어온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무엇인가 굴러가는 느낌은 들지만 정확히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양호한 편이다. 적어도 집에 돌아가긴 하니까.


나는 텅 빈 도로를 멍한 상태로 바라보며 버스가 와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반대편에서 한 신사가 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말끔한 차림의 그는 내가 붙인 '신사'라는 호칭이 어울릴 정도의 깔끔한 차림이었다.

지금 이 시각이 내 입장에서는 하루의 끝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의 첫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멋쩍어졌다. 그가 가까이 올수록 느껴지는 단정함과 청결한 냄새가 나의 민망함을 한층 더 키워나가고 있을 때, 그는 내 옆 자리 벤치에 앉았다.


-왜 이렇게 바짝 붙어 앉는담, 한 칸 띄고 앉을 것이지.


총 세 개의 자리가 만들어진 벤치에서 그가 내 옆자리에 앉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밀어 바로 옆 자리로 넘어왔다. 신사와 나 사이에는 한 자리만큼의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서 나는 대기판을 바라봤다.


"아직 출발 전일 거예요."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은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상한 사람의 눈빛 같지는 않아서 안심이 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 네 그렇죠." 라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표현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취할 정도로 마시진 않았나 봐요."


"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심지어 아는 사람도 저렇게 말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라나고 있을 때 연달아 그가 말했다.


"왜 사람들이 취할 때까지 술 마시는 줄 아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머릿속에서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도록 마을버스를 빨리 보내주십사 하는 기도문과 동시에 뭐라는지 들어나 보자 식의 작은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나흘 째 이어지는 술자리로 일주일 내내 취한 상태로 밤을 보냈기 때문이다. 회식도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지만 사실 취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기에 시작된 일이었다. 얼떨결에 끼어들어간 회식, 급조된 지인들과의 약속, 하다못해 혼술까지, 말로는 싫다고 했지만 속으로 은근히 반기며 어느 시점부터는 내가 술자리를 만드는 장본인이 되었다. 이쯤 되면 제정신 차리기가 곧 죽어도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왜 사람들이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나는 대답대신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배에 힘주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럼에도 밤을 새워 뻑뻑해진 눈은 어쩔 수 없었다. 겨우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하니까 술김에라도 해야지 안 그래요?"


취한 다음에는 웬만한 말에야 다 공감이 된다. 반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낯선 사람이 하는 말에 절로 반응을 하는 찰나, 그 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있었던 회의가 갑자기 떠올랐다.


회의는 두 시간 넘게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다. 의사결정권자인 간부들은 3분기 매출을 올리기 위한 방법을 찾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나 역시 회의를 잘 이끌기 위해 삼엄한 의견 대치 속에서 긴장한 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 되겠길래 한 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기대했던 반응과 다른 피드백이 돌아왔다. 피드백을 준 사람은 하필 평소 잘난 척하기로 소문난 ‘한 차장‘이었다. 내 의견에 '뻔한 소리'라고 말하며 핀잔을 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견이야 다를 수 있다고 넘기려 했는데 내 마음의 불씨를 당긴 건 다름 아닌 남달라 주임이었다. 남달라로 말할 것 같으면 내 말에 한 번도 동조한 적이 없는, 편하지 않은 주임이었다. 한 차장이 뻔한 소리라고 얘기할 때 남달라 주임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평소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주임이 그러니 너무 괘씸했다.


마음을 숨기려고 침 삼키듯 마음을 꾹 누르는 순간 뭐가 잘못되었는지 그 화가 위로 전달되어 순식간에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누군가 볼세라 고개를 숙였고 분한 마음 때문인지 그 이후 회의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기억나는 것이 없다. 한 차장이 다음 회의 때 결정하자는 말이 들렸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나는 이 회의를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결과를 잘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자책에 빠졌다. 무거운 마음만큼이나 몸이 무거웠다. 점심때 먹은 갈비탕의 기운은 다 어디로 빠졌을까. 커피 한 잔을 더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탕비실 문 앞에 섰을 때, 그 속에서 남달라 주임이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홀가분하다는 듯이 그녀는 다른 주임들과 시시덕 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 이후 이어진 회식, 나는 또다시 취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무엇인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제정신인 상태에서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입에서 줄줄 나왔다. 취한 사람이 취한 상대에게 말을 하는 것은 쉽다. 어차피 나중에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가정 때문일까, 아니면 암묵적으로 술자리에서는 그런 얘기에 화내지 말자 싶은 약속 때문일까. 나는 남달라를 옆에 앉혀두고 아쉬운 소리를 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신사를 그저 물끄러미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의 끝이 보일 때쯤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취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마음에 담아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기도 하죠. 문제는 속엣말을 해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서 정신줄 마저 놓아버린다는 거예요."


"... 그런가요?"


"정신줄 놓아버리는데 중독된 거예요. 그 중독이 무서운 이유가 뭔 줄 알아요? 점점 더 취하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순간 뜨끔했다. 그의 말에 따라 나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다름 아닌 취하는 것이었으니까. 가장 빠르고 쉽고 돈이 적게 드는 방법이자 혼자서도 가능한 말 그대로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내 머릿속에서는 도무지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속에 묵혀두며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갈 수 없었다. 분명히 베개 위에서 꼬리를 무는 분노와 걱정으로 잠 못 이룰 것이 뻔했다. 한참 동안 말없는 나를 두고 그는 마치 내 머릿속을 다 살펴보는 사람처럼 굴었다.


"자기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계속 묵혀두면 언제가 터져버리게 되죠. 그건 시한포탄과 같은 거예요."


이게 다 무슨 얘기람, 나는 그의 말이 알 것 같으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내 눈꺼풀은 점점 가라앉았고 드문드문 앞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이따금씩 그가 말할 때마다 눈꺼풀이 올라왔고 생각에 잠길 때는 아예 눈이 감겼다. 나는 거의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때 마침 버스 대기판에 '2분 후 도착'이라는 반가운 글씨가 들어왔다.


버스가 다가오자 나는 도망치듯 급하게 뛰어 올라갔다. 이어 곁눈질을 해가며 창문 밖 벤치를 힐끔거렸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깔끔한 슈트에 깨끗한 구두를 착용한 한 사람이 딱 봐도 가격이 꽤 있어보이는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곧 버스가 출발했고 그 신사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갔다.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동시에 방금 전까지 그가 했던 말이 너무 생생해 귓전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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