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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Jul 26. 2023

평생 같이 일할 것도 아닌데

2화

나는 집에서 고작 2시간 쪽잠을 잔 뒤 일어났다. 어쨌든 출근은 해야 했기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느껴지는 숙취를 무시한 채로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안 그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오늘 안조은 대리랑 회의를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속이 쓰린 것은 알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처방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때보다 더 진한 커피를 샀다.


회의가 시작하기도 전에 안조은 대리는 마치 불평불만 쇼의 리허설이라도 하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마 한가운데 무슨 심지가 박힌 마냥 미간 주름 두 줄이 선명했다. 입은 툭 나와 맘에 안 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식으로 복화술이라도 하듯 계속 불평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막상 회의가 시작되자 안조은은 도리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말 대신 자신의 의사를 대신 표현이라도 하듯이 연신 펜을 꾹꾹 눌러댔다.


-똑딱... 똑.... 똑딱.


규칙적으로 눌러대는 그 소리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얼굴이야 안 보면 그만이라지만 똑딱거리는 저 소리는 정말이지 참을 수 없다! 평소라면 큰 소리 내기 싫어서 넘어갔을 테지만 두통이 심한 상태라 나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안조은 대리, 그 똑딱거리는 소리 좀 그만."


내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그녀의 손이 멈췄고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안조은의 반응을 애써 무시한 채 나는 이어서 회의를 진행했다. 그때 '탁' 하고 볼펜 내리는 소리가 다른 때보다 더 크게 들린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손이 책상 아래로 슬그머니 내려가는 것은 보이는 동시에 회의실 전체에 긴장감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지는 회의에서 안조은은 매번 내 의견과 상반되는 주장을 했고 누가 무슨 의견만 내면 '지난번에 했는데 안 됐다' 라거나 '어차피 잘 안될 것 같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때마다 안조은의 의견을 흘려보내려고 했지만 마치 무슨 덫에 걸린 듯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또다시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전보다 더 의욕 없는 상태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안조은을 불렀다.

"방금 프로젝트 건 안 대리가 담당하세요."  


다른 팀원들이 맡고 있는 건들이 빡빡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 회의 내내 훼방을 놓은 안조은에게 한방 먹이고 싶은 의도가 컸다. 예상한 대로 안조은은 입을 삐죽거리며 인상을 썼다.


"이걸 왜 제가 해야 하죠? 저도 담당한 일이 많은데요?“


"보면 몰라요? 이거 홍보 건이잖아요."


"다른 주임들도 있는데."


"우리 회사에서 홍보 담당 안 대리 아니에요?"


나는 토를 다는 안조은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를 했다. 어떻게든 놀고 있는 안조은에게 일을 쥐어주리라는 생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근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상대는 처음 듣는다는 식으로 눈을 깜빡이며 따박따박 말대꾸를 했다. 정말이지 친동생이라면 한 대 쥐어박고 남았을 텐데. 그녀가 내뿜는 불평불만이 언제쯤 사라질까 싶을 무렵에 안조은이 목소리 톤을 높이며 성질을 냈다.


"과장님, 저는 이 일을 하려고 뽑힌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 건은 외주 맡겨서 하면 되는데 왜 매번 저한테 하라고 하세요. 다른 팀들 보면 팀 원 수도 많고 또 과장님이 엄청 챙기는데, 저는 매번 혼자 다 하고. 솔직히 누가 이렇게 일하느냐고요. 매번 얘기하지만 이건 계약서에 쓰인 거랑 다르죠. 엄연히 따지고 보면 저랑 연관도 없는 일인데 매번 회의 때마다 덜컥 받아오시고. 이렇게 일하면 안 되죠."


한 번의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로 이어지는 그 말에 나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이후 약 10분가량 안조은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어떻게 못할 이유만 저렇게 늘어놓을 수 있을까. 안조은은 새로운 일을 맡은 때마다 계약서에 쓰인 것과 다르다는 것, 외주를 쓰면 될 것, 이 두 가지의 말을 했는데 그 역시 너무 오랫동안 반복된 것이라 이제 신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말을 하면서 안조은이 뿜어내는 한숨과 불평은 점점 더 강조가 세어져 옆에 있는 사람까지 기운 빠지게 만들었다.


더 이상 들어줬다가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불평의 끄트머리에서 말을 끊었다. 그녀의 말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경고했다.


"됐고, 못하겠으면 관둬. 나 혼자 할 테니까."


안조은을 피하기 위해 회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누군가를 설득해 일을 하게 만드는 것보다 그냥 내가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회의실에 혼자 남은 안조은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분에 못 이겼는지 한참 동안 화를 삭이느라 회의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띵 했는데 퇴근하자마자 또 술 한 잔이 간절했다. 하지만 오늘은 붙잡을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만나자고 할까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빌딩을 나와 걸으면서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들어 곧바로 집에 가기 싫었다. 문득 며칠 전, 동네에서 점찍어 둔 바가 생각났다.


나는 자연스럽게 바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하고 급하게 한 잔을 마셨다. 묵은 체증이 알코올에 싹 씻겨 내려가는 것 같더니 다시금 안조은에 대한 괘씸함이 확 올라왔다. 누군가에게 속시원히 오늘의 일을 말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바텐더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는 맥주 두 세병을 더 주문했다. 바텐더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내 앞에 맥주를 가져다 놓고는 먼저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별 일이네, 말 거는 사람도 없고.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불현듯 버스 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오늘 있었던 일 치고는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내가 환상을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렴풋한 기억이었다. 나는 컵에 맥주 한 잔을 따르고 누가 권하기도 전에 한 번에 다 넘겼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어떤 한 문장이 또렷하게 떠오른 것이다.


-계속 묵혀두면 언젠가 터지는 법이에요.


신사가 했던 말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나는 금방이라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안조은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지만 갈등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괜히 싸움 만들어 좋을 것이 없었다. 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애착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일로 만난 말 그대로 남! 내가 할 일을 다 제쳐두고 사람 바꿔서 쓰자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 평생 같이 일할 것도 아닌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내가 참자 참아.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이만하면 됐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잘 피하면 그만이라고, 언젠가 안조은이 먼저 나가떨어져 사직서를 제출하거나 내가 좋은 곳으로 이직하는 날까지만 참으면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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