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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Jul 28. 2023

평화 혹은 가식

3화

"야, 너 그 말 몇 번째인 줄 알아?"

"무슨 말?"

"혼자가 편하다는 그 소리 말이야."


수화기 너머 들리는 친구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한번 더 그 말을 할까 싶다가 괜히 그런다 싶어서 관뒀다. 이어서 친구의 걱정스러운 말들이 이어졌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너무 혼자 있지는 마. 누굴 좀 만나기도 하고 그래라."


그러면서 친구는 나한테 ‘연애한 지 언제냐 그러다가 독거노인 되겠다’라며 농담섞인 말로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는 게 달갑지 않아서 나는 오늘 하루 잘 보내라는 형식적인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누구를 만날 생각도, 그럴 기분도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누굴 만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조금 외롭기는 해도 꼭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으니까. 적적할 때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통화하거나 그도 모자랄 때 혼자 나가서 영화 보고 쇼핑하면 그만이다.


-혼자가 편하다는데 다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나는 핸드폰을 저 멀리로 던지고는 다시 패드를 집어 들었다. 업무를 잘해보려 산 패드가 어느덧 유튜브 시청을 위한 전용 기기가 되어버렸다. 하루종일 누워서 화면을 바라봐도 시간은 잘만 흘러갔고 본가에서 나와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내게 간섭을 하거나 토 다는 사람이 없었다. 나와 놀아주는 맞춤형 서비스가 있기에 그걸로 하루를 보내다 잠들기 전 가볍게 한 잔 하면 됐다.

하지만 마음속 한 귀퉁이에서 헛헛한 마음이 든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으로는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했다. 예전에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밤늦게까지 지칠 줄 모르고 놀았는데.


-그때는 젊었지.


나는 과거 한 때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겼다. 사회 초년생일 때까지만 해도 멋모르고 즐거워했는데 지금은 그때와 참 달라져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주말 내내 집에서 쉬면서 보내고 싶다. 그래야 다음 주에 일을 하러 나갈 힘이 생기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뒤로하고 다시 침대에 바로 누워 유튜브를 켰다. 메인에 뜨는 동영상을 거의 다 보고 나서도 무엇인가 더 보고 싶었다. 당장 나를 즐겁게 할 어떤 것들이 이 안에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대충 뭐 하나를 틀어놓고 눈을 감았다. 졸려서 잔 것이라고 하기보다 지루함에 지쳐 잤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렇게 이른 잠을 자고 난 뒤 일어나 보니 새벽 네 시였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오히려 정신은 더 명료했다.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불을 켜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창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새벽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나는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를 날릴 겸 오랜만에 조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언제 신었을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 운동화를 찾아 신고 느슨해진 끈을 동여매었다. 집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와 점점 속도를 냈다. 익숙한 방향으로 걷다 보니 저 멀리 마을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며칠 전 취한 상태로 버스를 기다렸던 곳이었다.


점점 그 정류장과 가까워지자 벤치에 앉은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는 그 낯익은 모습을 보고 바로 신사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괜히 아는 척 하기는 싫었다. 평소 외향적인 타입은 아닌 데다 짧게 만난 것이 전부인 그 사람에게 아는 척했다가 상대가 날 못 알아보는 무안한 상황이 연출되는 게 싫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 앞을 무심하게 지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런 내 행동을 눈치챈 듯이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저번에."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괜히 말끝을 흐리고선 그를 마주 바라보고 섰다. 그를 몰라봤다는 투로 연기를 하며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어색하긴 매한가지였다. 신사는 지난번과 비슷한 정장차림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남모를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취한 상태가 아니라서 좋네요. 어디 가나 봐요?"


"네. 좀 답답해서요."


"맞아요. 그렇게 참고 살다가는 언젠가 터지는 법이죠."


또다시 나는 신사의 말에 뜨끔했다. 이 사람은 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제가 마치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놀라셨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자 신사는 옆에 앉으라는 듯이 벤치의 좌석을 두드렸다. 나는 지난밤에서처럼 그와 거리를 두고 벤치에 앉았다.


"그러니까. 제 머릿속을 다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말해봐요. 어차피 우린 아는 사이도 아니니까 소문날 일도 없잖아요."


어차피 아는 사이도 아닌 데다가 또 만날 일도 없을 거라는 말이 나를 설득했다. 바텐더한테 할 수 있는 말을 낯선 사람에게 못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나는 허심탄회하게 안조은에 대한 얘길 꺼냈다. 내 후임이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예의를 갖춰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또 평소에 얼마나 하소연 식의 자기 얘기를 하는지 모든 직원들이 그걸 듣다가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했다.


한번 말을 시작하니 평소에 잘하지 못했던 속에 있는 이야기들이 입 밖으로 쏟아지듯이 나왔다. 어쩌다 안조은 같은 사람이 내 아랫사람으로 왔는지를 시작해 그러고 보면 진짜 팀원 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도 고백했다. 요즘 회사 다니기 싫은 이유도 날마다 취하고 싶은 이유도 다 같이 일하는 사람 때문인 것 같다는 말 못 할 진실도 내뱉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신사가 물었다.


"그걸 왜 다 담아놓고만 있어요?"


"아휴, 안조은이랑 대치해서 뭐 좋다고요. 말 섞어서 피곤한 상황 만들 바에 그냥 저 혼자 하는 게 나아요. 속 시끄러운 것보다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게 제정신 건강에도 덜 해로운 것 같고요."


"지금 참고 있는 게 정신 건강에는 더 해로울 텐데요."


"아뇨. 저는 회사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요. 누구와도 갈등이 생기는 게 싫고요."


그러자 신사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는 잠깐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금 말했다.


"그게 지금 갈등이 있는 거예요."


"네?"


"지금 평화로운 상태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고요. 그건 가식에 가까워요."


생각과 다른 그의 말에 갑자기 멍해진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내가 가식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서로에게 피해 주지 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근데 가식이라고?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내게 신사는 일침이라도 놓듯이 진지하게 말했다.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이 잘 되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필요할 때는 불편한 말도 해야 해요. 아까 안조은이 불평을 그만하면 좋겠다고 했죠? 그 사람에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 본 적 있어요?"


"그걸 어떻게 얘기해요?"


"그럼 그렇게 계속 꾹 참으면서 행동할 거예요? 무엇을 위해서죠?"


나는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금 불편해지지 싫다는 생각에 도달했을 무렵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을 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일이 아닌 사람들에게 밑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빠져있군요. 그런 생각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고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뭘 아느냐고 소리치며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그가 하는 말이 다 맞아서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있었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중독이에요. 평화를 좋아하고 갈등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죠. 그 생각의 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이죠. "


"그게 나쁜가요?"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니 문제예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저는 늘 평판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어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괜히 숙연해졌다. 그동안 내가 착한 척하면서 놓치고 있던 게 무엇일까. 그에게 뭔가 더 묻고 싶었다.


"제가 안조은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만하라고 해야죠."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와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당당함이 느껴졌다. 낯선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자 창피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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