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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현 Sep 23. 2023

끝을 앞둔 엄마와 딸의 대화



타지 사는 내가 엄마와 대화를 나눈 방법



운전석에 앉아 벨트를 맵니다. 시동 버튼을 가볍게 눌러 차 내부 디스플레이 전원을 켭니다. 오른손을 운전대에 올려놓으면 엄지손가락이 휠 모양의 '통화' 버튼에 닿습니다. 휠을 돌리면 디스플레이에 최근 연락한 사람들이 뜹니다. 늘 그렇듯 가장 위에 올라 있는, 가장 최근 전화한 바로 그 사람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릅니다.


'엄마'


다만 이번엔 다음 단계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받을 사람이 없으니까요. 몇 년 간 무의식적으로 해 온 일련의 행동이었기에 오류가 난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주차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말았습니다. 엄마 장례를 치르고 며칠 후 운전하던 날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엄마에게 자주 전화를 했습니다. 서울-부산 거리가 아무리 세시간인 세상이라지만, 서울 사는 제가 부산서 암 투병하는 엄마를 챙길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 싸지고 내려가서 엄마 옆에 붙어 간호할 수도 없고요. 대신 활기찬 목소리로 신나는 얘기를 잔뜩 떠들면 가라앉았던 엄마 기분도 풀어지는 듯했습니다. 그게 제가 엄마에게 해 줄 수 있는 위로와 응원이었어요.



엄마와 통화하는 것은 주로 차 안에서였습니다. 다른 때는 일을 하거나 남편과 함께 있으니, 혼자인 차 안이 엄마와 얘기하기 가장 편했어요. 차에 올라타서 시동 걸기 전이나 길이 막혀 차가 멈춰 있을 때가 엄마에게 전화 거는 타이밍이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노라면 엄마 목소리가 오후 라디오처럼 편안하게 들려왔어요.




모녀간의 대화란  


우리는 거리낌 없이 인생사 만담을 나눴습니다. 제가 삼십 대에 접어들고 가정을 꾸리니 이전과 달리 엄마와 나눌 얘기가 부쩍 많아지더라고요. 나이가 들면서 여자로서 엄마의 인생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했고요. 저나 엄마나 피차 아줌마인지라 동네 반상회 수다 떨듯 통화를 했습니다. 아침저녁 차려 먹는 얘기부터 살림 사는 얘기, 건강 얘기, 친구들 얘기.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늘어놓다 보면 암도 일상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격하게 부딪칠 때도 있었습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은 일이 다툼의 도화선이 됐어요. 대개 상황은 엄마가 조언을 하고 제가 편케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비롯됐습니다. 제 딴에 엄마가 제 속도 모르고 하는 잔소리 같아 서운했고, 엄마는 엄마대로 제가 곱게 이해를 안 해 주니 실망했어요. 엄마가 '너 걱정해서 그러지'나 '너 잘 되라고 그러지' 할라 치면  저는 '엄마 마음 편하자고 하는 얘기'라고 맞받아치며 날을 세웠습니다.


바닥을 다 꺼내 보였습니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 앙금은 남지 않았어요. 그렇게 감정을 다 쏟아내고 나면 후련하기까지 했습니다. 날 것의 감정을 감추거나 왜곡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모녀 사이의 언쟁은 흔히 말하는 부부 싸움만큼이나 칼로 물 베기였습니다. 돌아서서 각자 진정하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얘길 나눴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매일, 또는 하루 걸러 한 번 전화를 하니 살아오며 어딘가 엉켰을지 모르는 감정도 풀려 나갔습니다.






마지막을 앞둔 엄마와의 대화



엄마와의 대화는 병세가 짙어질수록 밀도도 깊어졌습니다. 우리는 일상을 대화하듯 삶과 죽음을 이야기했어요. 생사 간의 경계가 흐려졌습니다. 저는 어딘가 끝을 향해 가는 엄마의 곁에 서서 엄마의 생각과 감정을 묻고 기록하는 딸이 되었어요. 아빠나 동생과는 다른 제 나름의 방식으로 엄마 삶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뭘 가장 하고 싶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지 며칠 지나 엄마에게 물었어요. 엄마의 답은 건강한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달랐습니다. 생각보다 평범했어요. 마지막까지 지금처럼 살림하고 싶다고요. 집안을 쓸고 닦고 정리하고, 가족들 먹일 음식을 만들고 싶다 했습니다. 건강한 할머니가 돼서 곧 태어날 손주도 봐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허락된다면, 젊을 때 사느라 바빠 아껴 뒀던 행복을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길 바랐습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일 년짜리 긴 해외여행이나 의미 깊은 봉사활동 같은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의 대화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결론 없이 흘러갔습니다. 희망과 절망이라는 양 극으로 달리는 감정 사이를 오고 갔습니다. 마지막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죽음이라는 끝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생에 누린 많은 것에 감사하면서도, 겨우 여기까지인 것에 분노했습니다. 엄마 삶을 이끈 우연과 필연을 인정했지만, 격하게 저항하기도 했어요. 살면서 만난 어떤 인연은 용서하고 사랑했지만 또 다른 어떤 인연은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엄마 생애 마지막 삼 년의 얘기에는 오십 년 삶을 돌아보며 느낀 감사와 회한이 있었습니다.



저는 엄마와의 대화를 녹음해 두었습니다. 이 모든 소중한 이야기가 공기 중에 파장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쉬웠어요. 다음 주엔 엄마가 떠난 후 처음으로 녹음 파일을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아 미루고 미루던 일입니다. 날짜를 정해 두고도 벌써 몇 번을 미루었는데 더 늦기 전에 파일을 열어 보려 합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듣습니다. 그토록 그립던 엄마의 목소리를요. 잘 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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