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용 Oct 23. 2020

문학적이고도 아름다운 헛소리

시에서 발견한 헛소리로 카피 쓰기

술 마시며 시 읽는 팟캐스트 <시시콜콜 시시알콜>을 아내와 함께 5년째 진행하고 있다. 시집에 어울리는 술 하나를 정해서 흥청망청 취해가는 방송이다. 음주 낭독이 메인 콘셉트인데 읽기 어려웠던 시가 술의 힘으로 스르륵 이해가 되는 마법을 녹음할 때마다 경험하고 있다. 덕분에 시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시가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닌 헛소리 때문이다. 시를 읽다 보면 문학적으로 변주된 아름다운 헛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온다. 헛소리라고 하기엔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헛소리라지만 눈물이 날만큼 슬프기도 하다. 참신한 표현들로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인들의 능력을 볼 때면 감탄사를 내뱉으며 자연스레 메모장을 꺼낸다.


박소란 시인이 우리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제주도 전통주인 고소리술을 마시며 그녀의 시를 낭독했는데 술이 오르고 흥이 오르자 같이 방송을 진행하는 아내가 버럭 화를 냈다. "시인님! 시가 너무 슬프잖아요! 술이 계속 들어가잖아요!" 정말이지 그녀의 시는 읽는 족족 눈물을 떨구게 만들고 술을 찾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종점>이라는 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중략)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이별을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해질 수밖에 없다. 왜 하필 집이 종점에 있어가지고! 다들 그렇게 나랑 서둘러 헤어졌는지! 나에게서 하차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진하게 올라온다. 마음을 쿵쿵 두드리고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런데 문장을 곱씹어 읽다 보면 헛소리의 기운이 살포시 느껴진다. 이별의 이유를 은연중에 집의 위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 종점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좀 나아질까요? 근데 이별이 종점에 위치한 집 때문이라면 환승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떡하죠?


하지만 누구도 이 시에 대해 이런 의문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버스 종점에 위치한 집을 탓하는 그 마음이, 어떻게든 이별의 이유를 찾고 싶은 그 답답함이 애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남 탓은 나쁘다지만, 어떤 남 탓은 가슴 시리게 공감이 된다.


이런 남 탓은 박소란 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금은 종영된 MBC 라디오 <잠 못 드는 이유 강다솜입니다>에서 팟캐스트와 동명의 코너로 약 6개월 동안 시와 술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 홍순영 시인의 <기울어지는 세계>라는 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여기서도 귀여운 남 탓이 눈에 띈다.


지구가 태양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는데 제가 기울지 않을 재간 있나요
(중략) 당신이 나를 삐딱하게 본대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삐딱해지는 내 마음을 이제는 기울어진 지구 탓으로 돌리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엉뚱한 소리 같지만 이상하게도 이 문장은 위로가 된다. 조금씩 비뚤어지는 나의 몸과 마음이 다 지구 탓이라고 생각하면, 나 말고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삐딱한 내 모습이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는 남 탓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 대상이 특정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하는 순간 남 탓은 신기하게도 위로가 된다.


남 탓은 대개 분노를 유발하지만, 귀여운 남 탓은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지점은 카피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의 이유를 색다른 곳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홍순영 시인의 지구 탓을 참고해서 회사 디지털 매거진에 이런 카피를 쓴 적이 있다.


#Copy

가끔씩,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지구가 23.5도로 기울어져 있는데

어떡하겠어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걱정될 때가 있다. 내 몸을 기울여 상대방의 어깨에 머리를 얹는 행위가 그 사람에게 부담이 되진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든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은근슬쩍 기울어진 지구 탓으로 돌리는 순간, 타인에게 기대는 행위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지구가 기울어져 있으니까. 다들 그런 거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카피나 글을 쓰다가 막막해질 때면, 기분 좋은 남 탓을 찾아보자. 그런 고민이 때로는 도움이 된다.


이전 10화 PC방에 오지 말라는 PC방 전광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