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아주 색다른 아이디어는 없는 법
카피는 먼저 쓰는 게 장땡이야~
언젠가 카피라이터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런데 일을 하면 할수록 이 말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왜냐고? 코피 날 만큼 열심히 만든 아이디어나 카피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그와 유사한 것들이 이미 세상에 나와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아깝다'는 생각과 '먼저 했어야 했는데'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찾아온다. 아,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카피라이터로 일을 시작했어도!
모 금융사 광고 아이디어를 낼 때였다. 광고주가 강조하던 해당 금융사의 장점은 단 한 가지였다. 업계 1위라는 것. 그날부터 나의 머릿속에선 1위라는 단어가 밑도 끝도 없이 맴돌기 시작했다.
'1위다.. 1위라고.. 1위니까.. 1위야.. 일위야... 이뤼야.. 이랴?”
문득, 소나 말을 몰 때 쓰는 의성어 '이랴'와 '1위야'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고민할 것도 없이 단숨에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말 위에 올라 탄 주인공이 "우리 금융사는... 1위야! 이뤼야!"를 외치는 식이었다.
며칠 뒤, 아이디어 회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회의실에서 의기양양하게 '이뤼야!’를 연호했다. 그런데 팀장님의 반응이 예상외로 차가웠다. 왜죠? 그래도 피식 웃음 정도는 나오지 않나요? 당황스러워하는 내 앞에서 팀장님이 한 마디를 꺼냈다.
"승용아, 이거 옛날 키움증권 광고에 똑같은 게 있어..."
잽싸게 검색을 해보니 내가 낸 아이디어와 2008년에 집행된 키움 증권 광고가 아주 흡사했다. 드넓은 초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가면서 "키움증권 1위야! 이뤼야!"를 외치고 있는 게 아닌가. 10여 년 전 광고가 내 발목을 잡다니. 왠지 모를 서글픔이 몰려왔다. 나는 마지막 아쉬움을 담아 팀장님께 한 마디를 더했다.
"그럼 말 타지 말고 소를 몰고 가면서 '이뤼야!'를 외치는 건 어때요?"
그렇게 나의 아이디어는 질주하는 말처럼 회의실 저너머로 빠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모 통신사에서 자영업자들을 위한 유선전화 관리 서비스를 론칭할 때였다. 해당 프로젝트에 나도 참여하게 되어 아이디어를 내야만 했다. 전화로 뭐 할거 없나? 전화기, 전화번호, 부재중 전화, 등등. 열심히 전화를 되뇌다가 뜬금없는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전화! 불편한 전화 서비스를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와 ‘전화’의 발음이 유사한 것을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극 느낌으로 우리 전화 서비스를 사용해달라고 말하는 광고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오케이! 이거면 회의 시간에 얘기해볼 수 있겠어! 나는 자신만만하게 회의실에서 이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그런데 팀장님이 갑자기 추억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닌가.
"내가 하나로텔레콤 광고에 참여했을 때.. 그 말을 똑같이 썼지.."
나는 황급히 2008년 하나로텔레콤 광고를 찾아보았다. 배우 박준규 씨가 조선 관리처럼 옷을 입고 "전화! 전화비도 따져봐야 하옵니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저기요, 2008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왜 제가 내는 아이디어가 다 그때 나왔던 거죠? 심지어 오래된 광고는 검색해도 잘 나오지도 않는데요! 원통하옵니다!
하지만 애달픈 내 마음과는 달리, 나의 아이디어는 그 자리에서 단칼에 통촉되었다.
아이디어를 고민하다 보면 본인과 똑같은 아이디어가 앞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있다. 하지만 하늘 아래 아주 색다른 아이디어는 없는 법. 지구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반드시 겪게 되는 시행착오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나와 엇비슷한 아이디어가 사람들에게 이미 소개되었다는 건, 나의 생각이 나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기죽지 말고,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고, 다시금 새로운 아이디어에 자신 있게 도전해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겐 더 멋진 아이디어를 보여줄 충분한 능력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