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가 훌륭할수록 이해는 직관적이다
내가 용광로입니까?
글 속에 나를 녹여내게?
누군가 자기소개서 쓰기가 너무 싫다며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취직 준비에 한창이던 나는 그의 글을 읽고 물개 박수를 쳤다. 맞아! 우리가 용광로도 아니고! 얼마나 더 많은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곳에는 이미 나처럼 환호하는 취준생들의 댓글이 가득했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글이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남은 이유는 다름 아닌 '절묘한 비유' 때문이다. 사실 스스로를 용광로에 비유한 것은 꽤나 엉뚱한 측면이 있다. 얼핏 들으면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높은 온도에서 광석을 '녹이는' 용광로와 글 속에 본인의 성장과정을 '녹여내야' 하는 자기소개서의 공통 속성을 절묘하게 연결시킨 순간, 이것은 탁월한 비유가 된다.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느낀 용광로처럼 절절 끓던 답답한 심정을 이내 떠올리게 만든다.
통통 튀는 비유는 무언가를 설명할 때 아주 효과적이다. 문보영 시인의 산문집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에는 재미난 비유가 등장한다. '시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녀는 '삽질'이라는 개념을 대뜸 얘기한다.
시를 쓸 때면 삽질하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나는 삽질이 좋다. 열심히 땅을 파다 보면 뭔가 나온다. 가령 새로운 삽. (중략) 그것은 유쾌한 삽질이다. 땅을 팔 때 계속해서 삽이 나온다는 건 파다 보면 뭔가를 만난다는 것이고, 뭔가를 만날 수 있다면 계속 삽질을 해도 좋다. 어차피 인생은 삽질이고, 그것은 때로 유쾌한 삽질이며, 시 또한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시를 쓸 때는 삽질하는 기분이 들고 그 기분에 자꾸 중독되는 것이다.
시 쓰기가 왜 삽질이지? 시는 본래 진지하고도 심오한 세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녀의 설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공감이 간다. 삽질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니까. 때로는 이상한 곳을 파고, 그 삽질 때문에 고통받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다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시를 쓸 것이다. '삽질'이라는 사뭇 부정적인 단어를 '시 쓰기'와 유쾌하게 연결시킨 덕분에 '시'라는 다소 어려운 개념을 보다 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비유의 힘'은 내가 카피라이터 면접을 볼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합격의 마지막 관문인 최종 면접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소위 압박면접이라는 게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내 앞에 앉은 임원 세 분은 공격적인 질문을 쉼 없이 이어갔다.
"지금껏 광고 관련 경험이 하나도 없는데요. 저희 회사에 큰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닌가요?"
"언론사 관련 이력이 많은데요. 그럼 광고 회사 말고 언론사를 지원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제가 압박붕대를 둘러야 하는 삐끗한 발목도 아니고.. 왜 면접에서까지 압박을 받아야 하는 건가요... 진땀을 빼며 열심히 답변하던 도중 까다로운 질문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카피라이터에 지원하셨잖아요. 지금 본인을 소개할 수 있는 카피를 쓸 수 있을까요?"
올게 왔구나 싶었다. 저는 3분 카레가 아닙니다만.. 3분 안에 뚝딱 카피를 써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 찾아온 것. 어떻게든 먹음직스러운 카피로 나를 소개해야만 했다. 고민 끝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코털입니다."
내 말을 듣던 임원 분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신성한 면접장에서 코털이 웬 말이냐고 다들 얼굴로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서 코웃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저의 광고에 대한 열정은 코털처럼 잘라도 잘라도 계속해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면접장에 있던 임원분들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다들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면접관들을 웃기는 데 성공했다니.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웃음이 사그라들자 한 분이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왜 하필 코털입니까? 겨드랑이 털도, 머리털도 다 계속 자라지 않습니까?"
"겨드랑이 털은 미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요. 머리털은 일부러 기르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코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보이면 민망하고 부끄럽죠. 엄청 신경 쓰이는 털입니다."
나는 합격을 향한 의지를 담아 한 마디를 더 외쳤다.
"저의 열정은 코털처럼 쉽게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몇 주 뒤, 나는 카피라이터 직군으로 지금의 회사에 최종 합격했다. 코털 때문에 내가 카피라이터가 된 것은 아니겠지만, 코털이 면접관들에게 큰 웃음을 가져다준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어떤 방식으로든 면접장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건 중요하니까. 한동안 코털을 깎을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물씬 생겨났다. 고마워, 내 코털아!
비유는 엉뚱할수록 더욱 파워풀해진다. 헛소리처럼 느껴진다면 더더욱 좋다. 대체 이걸 왜 여기에 비유한 걸까? 궁금증을 자아내면 일단 절반은 성공이다. 나아가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면 어느새 공감대가 형성된다. 임팩트가 생긴다.
비유는 발명이 아닌 발견의 영역에 가깝다. 우리 주변에 있는 서로 다른 개념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게 비유의 핵심이다. 그리고 비유가 훌륭할수록 이해는 직관적이며 매력은 올라간다. 폭스바겐의 '비틀(BEETLE)'이란 자동차는 디자인부터 이름까지 '딱정벌레'라는 명확한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자동차를 딱정벌레에 정교하게 비유한 셈이다. '비틀'은 한때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3위에 속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브랜딩이 걱정이라면, 콘셉트가 고민된다면, 때론 비유할 대상을 새롭게 찾아보자. 그것만으로도 근사한 크리에이티브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