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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용 Oct 29. 2020

오늘도 성공적으로 실패했습니다만

아이디어는 결국 취향의 문제니까요

카피라이터가 가장 많이 쓰는 카피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패한 카피'가 아닐까 싶다.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는 다양한 브랜드의 카피를 쓰지만 그것이 실제로 소비자들에게 가닿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카피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 역시 드물고도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광고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보고 과정과 실행 단계가 필요한데, 여기서 각종 수정 사항들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카피를 '쓰는' 사람보다는 '바꾸고 고치는' 사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이디어 회의는 언제나 치열하고도 두려운 시간이다. 나의 카피와 아이디어가 다른 이들로부터 괜찮다고 평가받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나면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내 책상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이마트를 마을 이장님으로!


몇 년 전, 이마트 브랜드 광고 캠페인에 참여할 때였다. 당시 이마트는 대대적인 리브랜딩을 계획하고 있었다. 광고주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새로운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했고, 우리는 클라이언트의 의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광고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디어 회의를 준비해야 했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이마트를 머릿속으로 수없이 반복, 또 반복하기를 계속. 그러다 보니 브랜드명이 새롭게 느껴졌다. 어라? 자꾸 발음하다 보니까 묘하게 사람 이름 같기도 한데? 의인화를 해보면 어떨까?


마침내, 나의 머릿속에서 '이막두' 마을 이장님이 태어났다. '이막두'라는 이름을 빨리 발음하면 얼핏 이마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여러분, 정말이라고요?) 그가 브랜드를 대표하여 혁신적인 서비스를 보여주면 재미날 것 같았다.


마을 주민이 "아, 요즘 생필품은 어디서 산디야?"라고 말하면 이막두 이장님이 번개처럼 나타나 물품 배송을 해준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빠른 배송은 이막두! 역시 이마트!" 누군가 물건 가격을 보면서 "좀 깎아주면 안디야?"라고 외치면 이막두 이장님이 소리 소문 없이 등장해서 가격을 할인해준다. 뒤이어 나오는 그의 한 마디. "할인도 이막두! 역시 이마트!"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보니 내 눈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다소 어이없는 설정이긴 했지만, 덕분에 이마트의 브랜드 가치를 재치 있게 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준비한 아이디어를 노트북에 고이 담아 회의실로 가져갔다.


그리고 나는 벽을 만났다. 높고도 단단한 철벽을. 아이디어를 발표할 때만 해도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지만, 그 뒤로 회의실에서 나온 피드백은 냉정했다. 진지한 톤 앤 매너로 결연한 혁신을 얘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머러스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어떡하냐는 우려가 나온 것이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막두 이장님에게 송구한 마음이 물씬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장님. 만나자마자 이렇게 이별이네요. 슬프지만 어쩌겠어요. 저는 정말 좋았지만 다른 사람들 생각은 다른가 봐요.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내 머릿속에서 고이 잠드셨다.




"1~2인분이라고 돼있었거든요? 그럼 1인분이잖아요?"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코미디언 김민경이 한 말이다. 처음 들으면 어쩐지 이상한 말 같다. 2인분인데 왜 1인분이라는 거지? 하지만 애초에 1인분이라는 개념은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을 뜻하니까. 그녀의 말은 절묘하게 옳은 말이 된다. 3인분이든 4인분이든 혼자서 다 먹을 수 있다면 나에게만큼은 1인분이 되는 법.


아이디어나 카피도 1인분처럼 아주 주관적인 영역에 속한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누군가는 과하다고 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부족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수만큼 각기 다른 취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끔은 누가 뭐래도 그것이 나에게만큼은 적당한 1인분 같은 아이디어였다고 굳게 믿어볼 일이다. 나의 아이디어를 향한 사람들의 반응이 별로라고 해서 나라는 사람까지 하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꿋꿋이 나의 취향을 믿고 자존감을 잃지 않을 것. 그렇게 다짐하면서 나는 헛소리 같은 아이디어를 오늘도 회의실에서 말한다. 그리고 성실하게 실패를 마주한다. 때로는 무릎을 꿇게 되더라도 다시금 일어나서 도전할 수 있는 나니까.


안 그래요, 이막두 이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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