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겨울 속으로, 테겐제(tegernsee)

by 여름지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은 뮌헨에서 마지막 날이었다. 공항이 있는 프랑크푸르트 가는 길에 하루 머무를 곳이 생겨 전날 미리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계획했던 대로 나름 밥 해 먹기에 공을 들였고 틈틈이 혼자 혹은 둘이서 여행자로서의 일상도 시도해 보았기에 아쉬울 게 없었지만, 도는 레트로 감성 같은 게 있었다. 옛날 시골 부모님이 서울 아들집에 가면 서울구경시켜 드리는 그런 마음 말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차를 빌려 뮌헨 근교 호수 마을을 구경시켜 주겠단다(은근 아들 자랑?;;). 그래, 그러자! 가볍게 생각하고 따라나서면 될 것을 혼자서 잡생각을 한다. 20대 후반인데도 어쩐지 아직도 미덥지 못하여 구경시켜 주겠다는 제안이 꼭 아이한테 떡 얻어먹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주저한다. 운전에 대한 불안인지, 진짜 가기 싫은 건지, 독립을 못한 건 도가 아니라 내가 아닌지.. 미적거리다 결심 같은 걸 하게 된다. 그래, 가보지 뭐.


독일어로 제see는 호수란 뜻이다. 예전에 가본 티티제도 그래서 호수마을이었군. 뮌헨 근교 호수들 중 하나인 테겐제 tegernsee를 향해 이름이 미니로 시작하는 그 작은 차를 렌트해 출발했다. 전날 기온이 내려가고 눈까지 내렸으나 금방 녹아서인지 시내를 벗어나 달릴 때까지 풍경은 그저 평범했다. 조금 익숙해진 거리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자 내일 떠난다는 생각에 살짝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고속도로 쌩쌩 달리기가 오래지 않아 갑자기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린다는 표현은 모자란다. 우리가 수다를 떠느라 잠깐 바깥 날씨에 무심해진 사이 작은 차는 순식간에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겨울 왕국에 들어선 것 같았다. 거의 빠져나온 겨울로 돌아서 이 차는 역주행하고 있었다. 가보지 않은 핀란드나 북해도의 겨울 풍경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설경이 어마어마 했다. 뜻밖의 이 놀라운 풍경에 처음에는 환호성을 질렀지만 곧 우리는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눈길이 익숙지 않은 운전자와 폭설이 주는 긴장감이 오고가고 있었다. 어쩐지 길을 잃어 만나지 못할것 같은 호수마을에, 어쩌다 그곳에 들어간들 돌아 나올 수 있기나 할까하는 불안까지.


다행히 차 도로는 문제없었지만 나머지 길들은 모두 눈으로 지워졌다. 호수 근처로 들어서자 도로는 좁아지고 드문드문 사람들과 아기자기한 풍경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디쯤 멈춰야 될 것 같은데 도는 마냥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고 있다. 계속 어딘가를 돌고있는것 같은 난감함. 주차할 마땅한 곳이 없어서다. 길에 갇히고 눈에 갇힌 우리는 다시 말수가 줄고 가끔씩 들어오는 반대편 차만 계속 받아들였다.

길가의 자작나무는 영화에서처럼 눈세상과 무척 어울렸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고맙게도 공간을 발견하고 비로소 차는 멈췄다. 마침내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눈 내리는 호숫가에 섰다. 그때의 느낌을 소설 <호수의 일> 속 문장을 패러디하여 꺼내본다. 내 마음은 눈을 맞으며 일렁이는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는 아니지만 때때로 불안하다. 때때로 불안하지만 상상을 넘어선 경이로운 풍경 앞에서 몰려오는 황홀감은 어쩔 수 없다. 마음은 호수와 같아, 마음은 호수와 같아 들뜬 마음은 이내 돌아서 허무 속으로 들어간다.



차 안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겨울 속에 갇혔다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갈 때도 그랬듯 오는 길에도 잠깐 바깥을 소홀히 하는 사이 봄도 겨울도 아닌 밋밋한 풍경이 툭 나타났다. 타임머신은 진녹색의 작은 자동차였다.

이제 남은 여정은 하이델베르크 옆 라덴부르크만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