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EL-GÄST AM GARTENTOR LÄUTEN. von 17:00 bis 21:00 Uhr
호텔 손님은 정원 입구 벨을 눌러 주세요/ 오후 5시에서 저녁 9시까지.
유리문에 붙어있던 안내문이다. 캐리어를 돌돌 끌며 기차역에서부터 걸어온 우리는 문이 잠긴 호텔 앞에서 잠시 숨 고르기를 했다. 알려준 대로 왼쪽으로 몇 발작 걸어가 철제문 벨을 눌렀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도도 나도 한 번씩 더 눌렀지만 조용하기만 하다. 설마 이렇게 차려놓고 영업을 안 하는 건 아니겠지? 온라인 예약이 이곳에 필요할까 싶어 무작정 동네를 둘러보다 발견한 곳이다. 작은 동네 지역 호텔은 이렇게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즉석에서 체크인을 해도 될 것 같은, 막연한 생각대로 정말 문을 두드리듯 벨을 눌러놓고는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 당황스러웠다.
마치 동화 속 코스프레 같은 걸 하게 된 이곳은 라덴부르크,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출국 장소인 프랑크푸르트 공항이랑 한 시간 정도 거리라 전날 왔다. 유명한 하이델베르크에서는 트램을 타고 올 정도로 근교이지만 볼거리 많은 그곳을 패스하고 우리는 이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려 어슬렁 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곳과의 인연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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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꼭 다시 오리라 결심한 곳이다. 그렇다고 ‘여행’이라 계획하지 않은 이번 여행 일정에 들어있었던 건(당연히) 아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여정이 그랬듯 여기서 하룻밤 묵어가기도, 흐르는 물이 돌을 만나면 자연스레 줄기가 갈라지는 것처럼 상황이 그렇게 이끌었다. 하물며 이미 그쪽을 향한 마음이 가득했다면 일정을 바꾸기는 얼마나 쉽겠는가.
벨을 눌러도 소식이 없던 그 호텔을 바로 떠나지 않고 있었던 건, 아니 애초에 그곳을 선택했던 건 큰 나무 때문이었을 거라고 이제야 짐작해 본다. 어쩜 모두의 삶에는 자기만의 패턴, 무늬가 있는 건 아닌지, 단조롭기 그지없는 내 삶에는 언젠가부터 나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텔 건물이랑 키재기라도 하듯 옆에 서있던 잎을 떨구어도 우람한 나무 한그루는 그래서 이번 여정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나무를 보느라 지체하던 사이 정원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살짝 슈렉 분위기의 중년 아저씨가 나타났다. 도는 반사적으로 다가갔고 몇 마디 나누더니 문이 열렸다.
라덴부르크는 서기 98년에 도시 지위를 얻은, 로마시대 유적이 동네 곳곳에 있을 정도로 오래된 곳이다. 골목을 걷다 보면 집 연도가 바깥에 적혀있는데 17,18로 시작하는 건 보통이고 1500이라 적혀 있는 집도 보았다. 이런 오래된 곳 동네 호텔에 우리가 발을 들인 셈이다. 4년 전 바삐 둘러보며 슬쩍 눈에 들어온 것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레스토랑이 있는 1층을 살펴보고 말 것도 없이 일단 안내하는 대로 1인실이 있는 3층 방 열쇠 두 개를 받았다. 내 캐리어를 번쩍 든 주인장 아저씨(의외의 이방인 손님에 조금 당황한 눈빛)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어디에도 투숙객은 없어 보이던 조용한 실내, 그날 밤 손님은 정말 우리 둘 뿐이었다. 두리번거리며 작은 방에 들어서자 오래된 집에서 나는 냄새가 살짝 풍겼다. 그럼에도 이곳을 가꾸는 검소한 손길이 이루어낸 소박하고 정갈한 객실 모습에 냄새가 불결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정감이 갔다. 그렇지, 여긴 이 냄새가 어울려.. 그나저나 손님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해 놓은 것일까. 여러 정황상 손님과 손님 사이에 먼지가 앉는 시간이 흐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올라와서다.
낯선, 오래된 동네 오래된 호텔? 에서의 잠자리가 현실감이 없었지만 의외로 잠을 잘 잤다. 스스로 놀라며, 먹을 수 있다는 조식은 어떻게 되나 싶어 방문을 열었더니, 빵냄새가 아래층에서 솔솔 올라온다. 진짜 호텔이네, 절로 군침이 돌며 도를 깨워 조심스레 내려갔다. 우왕, 두 사람뿐인데 또 골고루도 차려놨다. 우렁각시는 어디로 가고 넓은 레스토랑엔 단 두 사람, 정말 우리를 위해 이런 조식이 차려졌단 말인가! 놀랍고 겸연쩍어하며 이것저것 맛을 보았다.
도가 화장실로 사라진 사이 혼자가 되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먹는 것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라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주방 쪽으로 다가가 Excuse me! 를 외쳤다. 뮌헨 도착 첫날 기차 안에서 외쳤던 익스큐즈미랑 기분이 영 다르다. 그때는 불안, 공포의 외침이었다면 지금은 안정, 안도의 오지랖이다. 슈렉 아저씨가 둥그레진 눈으로 달려 나왔다. 그때 내가 했던 말, 영어를 옮길 수는 없다. 사실 기억할 수 없는 즉흥적인 기분에 어휘에 어순도 엉망일 것이며 들은 영어도 당연 기억 못 한다. 그럼에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생각나는 건 언어는 수단일 뿐이었지 내 호기심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 저기 바깥에 나무 종류는 무엇인가요?? 너무 크고 아름다운 나무인 것 같아서 매우 궁금합니다.
- 어어...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사진 한 장, 밤이 있는 사진을 들고 나오며) 이것과 비슷합니다..
- 앗! 밤나무.. 호두나무인가요?
- 아니고, 비슷하긴 하지만 다르.. 블라블라.. 못 먹고..
- (도 등장) 블라블라...
- (갑자기 아저씨 사라졌다가 검은 열매 들고 나오며) 여기 열매가 있었네요. 마로니에라고도 하고..
- 아, 마로니에! 알겠어요, 서양칠엽수!
나무로 말을 터자 라덴부르크에 대한, 옆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그리고 호텔의 역사까지 줄줄이 나왔다. 윗대부터 해온 오래된 가족 일이며 한때는 지역 신문에도 자주 등장하던 지방의 명소였다고. 첫날 들어올 때 보았던 분홍색 옷을 곱게 입은 백발의 어머니랑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는 내력도 들었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는 도를 응원하였으며 다시 오라는, 오겠다는 정다운 대화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썰렁한 호텔 운영 방식이 짐작되었다. 이 나이 든 모자(母子)에게 호텔이 어떤 의미인지, 그들에게 호텔 일은 이제 수지가 맞아야 되는 사업이 아니라 살아가는 한 모습일 뿐, 쓸고 닦고 손님 맞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언제든 지나가는 누군가가 쑥 들어와도 준비된 깨끗한 룸과 음식을 내줄 수 있는 부지런함이 일상을 지탱하는 원천인지도.
마음속에 있던 라덴부르크를 다시 가보니 놀랍게도 지금 살고 있는 양평을 많이 닮아 있었다. 라인강의 지류인 네카어강을 옆에 둔 강마을, 강마을 특유의 고즈넉함과 풍요로움이 흐른다. 물가에 살고 있어도 늘 물이 그리운 나에게 그곳은... 언제라도 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아닐지?
꿈에도 한 번씩 나타나는 물가의 풍경은 마치 파랑새 같아… 다가올 날들에도 여전히 파랑새는 내 앞에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유혹하는 건 또 아닌지? 파랑새를 쫓아야만 살 수 있는 나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몽상가다.
마치 마지막 라덴부르크 여정을 위해 달려온 것처럼 여행은 끝났다. 위로를 하러 떠난 길이 오히려 위로를 받고 온 것 같은 이 마음은 무엇일까. 아들과의 시간, 이국의 멋진 풍경과 길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누린 것들을 다시 상기하며 마음을 들여다본 쓰기의 시간은 되돌아온 질풍노도의 시간을 살짝 보듬어준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