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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읽기

탄생을 지켜보다/ 기이한 일

윌리엄 트레버 단편 읽기 1

by 여름지이


옛날에 런던의 외딴 교외에 에포스라는 나이 지긋한 여인이 살았다.

마치 옛이야기를 들려줄 듯 시작하는 첫 문장은 평범하나, 이렇게 시작하면 빨려들 듯 읽게 된다. 드라마나 다른 소설에 단골로 나오는 여자 노인들 이야기일지라도 또 새로울 것이다. 가끔 잘 시간에 멀고도 먼 곳의 엄마에게서 뜬금없이 걸려오는 전화가 그렇다. 어디 갔냐고, 금방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갑자기 왜 안 보이냐는 구순 노모의 황당한 말은 익숙해지지 않고 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니까.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에포스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경험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가. 에포스라는 늙은 여인의 행로는 달랐다.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고 누울 자리를 알아차리고 찾아가는 이야기다. 여기서 누울 자리는 결과적으로 해야 할 행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깨달은 일을 실천하기 위해 진짜 그녀는 임대 계약한 집을 정리하고 이웃 더트 부부의 이층 침대 방으로 누우러 간다. 그럼 더트 부부는 어떤 사람들이며 이들의 방에 눕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애포스는 이들의 삶에 동참하게 된 것일까.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끝까지 긴장감을 주며 펼쳐지는 미스터리 같은, 언어가 직접적이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독특하고 흥미롭다.


나는 사람들한테 이해심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늙어 가면서 점점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답니다. 인간이란 본래 이해심을 타고나지 못한 것 같아요. 가장 가치 있는 일들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죠. 그리고 그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해요. 기이한 결말에 이게 뭐지? 하는 궁금증에 사로잡혔지만, 그동안 이해한다고 했던 것들이 진정 이해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나의 편협한 세계 안에서의 일이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불러오는 이상한 힘의 실재는 어쩌면 이해불가의 영역이라 에포스의 말처럼 그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누군가를 향한 예의인지 모르겠다. 더트 부부가 간절히 바란 것은 아이를 갖는 일이었다.


탄생에서 아주 멀어져 죽음에 가까이 간 노인 이야기에 '탄생을 지켜보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해심 부족한 인간은 그럼에도 또 유추한다. 탄생과 죽음, 아이와 노인은 같은 의미 다른 단어 아닌지. 아이를 간절히 바라는 부부에게 누군가에겐 쉽게 주관할 수 있는 탄생이 어려울 때 노인이 대안이 되었을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모두 경험하여 이해나 생각의 영역이 아닌 본능을 느끼고 믿는 에포스 같은 노인. 에포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퍼뜩 깨달았다.



단편 소설은 읽고 나면 여운이 꽤 남는다. 누군가의 내밀한 삶을 몰래 들여다본 것 같은 열없음과 인생의 비밀 같은 게 보이는 희열, 반대로 낭패감 같은 게 일어났다. 단편소설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읽으며 그런 감정들에 사로잡혔었다. 요즘 읽고 있는 윌리엄 트레버(1928~ 2016)의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모든 소설, 특히 단편들은 디어 라이프, 친애하는 인생들에게 라는 의미가 절로 다가온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람에게 이토록 다양한 삶들의 속내를 보여주며 애틋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는 연민을 불어넣어 주는 단편은, 그래서 어렵고도 매력적이다.

윌리엄 트레버, 이분 역시 아일랜드 코크 출신이나 어려운 조국의 형편으로 영국으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했다는, 알고 보니 단편소설의 거장이었다. 관계 설정과 밀도 있는 인간 심리 묘사가, 많은 스토리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는지 한편씩 읽을 때마다 알고 있는 영화가 떠오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나에게 단편 읽기는 무서워하면서 그래도 모르는 길을 걸어가는 일 같다. 나이가 들면 조금 용감해질 줄 알았는데, 더 겁쟁이가 되어가는 현실, 어쭙잖게 알게 되어 그렇다면 좀 더 알게 되면 어떨까. 모험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에게 어쩌면 나에게로의 여행이 다른 삶이 거울이 되어 이루어지는 단편 읽기, 어찌 두렵지 않으리.

그럼에도 자전거길 좋은 구간에서 스탬프 찍듯 와닿는 편 글쓰기를 해보려 한다.






*민트색은 책 그대로 인용

*윌리엄 트레버/ 윌리엄 트레버 지음, 이선혜 옮김/ 현대문학 단편선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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