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가족, 그리고 나의 축제

기념일과 클래식(6) - 음력 8.15 추석

by 푸르름


추천곡 : 레스피기의 '로마의 축제' 중 3악장


추석.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념일 중, 추석은 글자만으로도 맛과 냄새가 느껴지는 날이다. 뜨끈한 육수가 섞인 떡국으로 한 해의 시작을 알리며 들뜨게 하는 설날이 있지만, 구수한 전과 직접 빚어낸 송편을 떠올리게 하며 지친 한 해를 쉬고 가는 추석은 좀 더 진한 미각과 후각이 느껴진다.




본래 추석이란 우리 민족이 태풍과 가뭄 등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앞으로 있을 추수를 기원하며 놀고 즐기는 축제기간이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힘겨웠던 여름농사를 끝마치고, 금빛으로 물들 산과 논, 밭의 풍년을 고대하던 농업 국가 때는 추석이란 축제가 가지는 의의는 상당했다.

비록 그때와 달리 농업국가를 넘어 제4의 물결을 맞이한 현대이지만, 추석은 열심히 달려온 한 해를 돌아보고 성공적인 마무리를 기원하는 21C의 우리에게도 단비와 같은 마음의 축제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추석을 기념하여 소개하고 싶은 클래식은 레스피기의 로마 3부작 중 ‘로마의 축제’ 3악장이다. 레스피기에 대표곡이자 그가 만든 가장 화려한 로마 3부작은 각각의 곡이 4악장을 가지고 있으며, 4악장은 서로 연결되듯 로마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럽인들의 영원의 도시 로마의 모습을 고대부터 현재까지 축제로 표현한 이 곡은, 민족 최대의 축제 추석을 소개하는 데 있어 알맞은 곡이라 생각한다.

레스피기가 활동하기 전, 이탈리아는 바로크 시기에 코렐리와 비발디에 의해 바이올린을 주류로 하는 독주 악기 음악의 번영기를 맞이하였다. 또 18c로 접어들며 로시니를 필두로 한 베르디와 푸니 등에 의해 오페라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등 문화적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기악 작품들은 번성한 오페라에 밀려 미미한 존재감을 보여주어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을 주었다. 이러한 형국에 20c 초입구에 접어들어 레스피기의 등장으로 이탈리아 기악음악은 그토록 원하던 부흥기를 열게 된다.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1879년 ~ 1936년)는 볼로냐에서 태어나 그곳 음악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졸업(1901년) 직전과 직후에 두 번 러시아로 가서 림스키 코르사코프에 사사했다.

당대 최고의 관현악 대가였던 스승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레스피기는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의 기법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자신의 출세작이자 이탈리아 관현악의 자존심을 살려준 '로마 3부작'을 작곡하기에 이른다. 1913년 볼로냐에서 로마로 이주한 그는 로마의 산티 체칠리아 음악원의 작곡 교수에 취임하고 1924년에 음악원의 원장이 된다.

로마는 레스피기에게 있어 마음의 안식처와도 같았다. 과거에 대한 음악적 향수를 짙게 갖고 있던 그는 영원한 도시 로마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했다. 아름다운 자연이나 풍물을 물론 고대 역사의 문명의 꽃을 피운 지역으로 유럽 종교의 중심지이자 유적 전통적인 행사를 보존하고 있는 로마는 그가 인생을 바치기에 부족함 없는 환상의 도시였다.

그 결정체가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분수, 로마의 축제로 구성된 교향시 로마 3부작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로마 3부작이 인기를 얻었던 건 아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로마의 분수의 경우 1917년 3월 11일에 로마의 아우그스테오 음악당에서 안토니오 과르니엘리의 지휘에 의해 '로마의 분수'가 초연됐으나 혹평을 받았고, 레스피기는 낙담해, 스코어를 책상 서랍에 처박아 뒀다. 잊혀 가던 이 명곡은 도스 카니니가 밀라노에서 연주하기 위해 레스피기에게 작품을 의뢰해 오자 마땅한 신곡이 없어 궁색했던 터에 그 스코어를 보내게 된다.

그리하여 1918년 2월 11일 토스카니니에 의해 연주회가 열리게 된다. 레스피기는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연주회장을 찾지 않았으나 청중들의 열광 속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곡의 진가를 드러내게 됐다. 아루트르 토스카니니는 1929년 뉴욕 필하모니와 함께 '로마의 소나무'를 지휘했으며, '로마의 분수'를 재탄생시키며 로마 3부작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교향시 로마 3부작은 1916년 작 ‘로마의 분수’가 새벽부터 일몰의 각기 다른 4 장소의 모습을, 1924년 작 ‘로마의 소나무’는 정오부터 새벽까지의 4 장소의 모습을 표현하며 시간에 따른 장소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가장 마지막에 작품 로마의 축제는 특정 장소가 아닌 로마 자체를 표현하며 이전 2 작품과 달리 모던함을 뒤섞은 명곡이었다.

레스피기의 관현악 작품 중 무엇보다도 화려하면서 파격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이 돋보이는 '로마의 축제'는 로마 3부작의 마지막 완성 퍼즐이다. 이 곡에는 만년의 역량이 총 결집되어 있을 뿐 아니라 로마의 고대,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현대 등 네 종류의 로마 축제를 다루면서 이탈리아의 자긍심을 전 세계에 고취시켜 의의가 크다.



이 중에서도 1악장 ‘원형경기장을 기념하는 축제’에서의 어두움과 군중 소리, 2악장 ‘50년제’에서 레위기 25장을 표현한 순례자들이 기도를 하며 나오는 장엄함 또한 훌룡하지만 이후에 나오는 3부 ‘10월의 축제’가 추석에 가장 추천하고 싶은 부분이다.


포도 수확기인 10월 로마 근교의 수많은 시민들의 사냥 나팔소리, 바이올린 피콜로가 표현하는 아름다운 종소리는 마치 포도로 가득 차 저마다 취한 채 즐기는 로마를 넘치듯 표현하였다. 4악장 ‘주현절’에서 클라리넷과 트렘펫의 엇박자로 흥겨움을 연출한 부분 역시 축제에 어울린다. 그러나 종교적 의의가 큰 다른 악장과 달리 3악 장은 전 세계 누구나 공감하는 축제에서의 흥겨움과 흥분, 열기를 표현하였기에 이곡을 추천한다.

코로나와 더불어 1인 가구가 늘어나며 점차 가족이 대규모로 모여 흥겹게 송편을 빚고 덕담을 건네던 모습은 이제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추석이 갖는 축제에 의의가 퇴색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부둥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만이 축제의 의의가 아니라, 한해의 고된 여정에서 모처럼 쉴 수 있다는 휴식에 대한 기대와 흥겨움이 더 중요한 가치라 생각한다.


올해는 쉼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지금, 레스피기의 ‘로마의 축제’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휴식이라는 축제를 선물하는 추석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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