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르름 Apr 03. 2022

두 눈에는 푸른 바다가 빛나고 있었다

서른이, 지구대 실습일지 - 7화


‘노인은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만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 노인과 바다 중


군대 전역을 100일 앞두고 소설 30권을 꼭 읽고 나가겠다는 포부를 가진 적이 있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시작으로 권터 그라스의 양철북까지 학창 시절부터 꼭 읽어야겠다 생각한 책들을 읽는 것이 하루의 낙이었다.

모든 책들이 나에게는 뜻깊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였다. 84일간 작은 물고기조차 잡지 못한 그를 사람들은 포기하라 했지만 사흘간에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결국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다. 이후 상어 떼에 의해 잡은 물고기는 뼈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는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 없다’는 명언을 남긴 채 평온한 얼굴로 깊은 잠에 들게 된다. 육체적으로 무너지는 경우는 있어도 정신만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노벨을 사로잡은 그 문구가 나에게는 매우 크게 다가왔다.


이러한 노인들은 소설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존재한다! 난 이 사실이 마주했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제2의 인생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배를 띄우는 노인들은 지구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흔히 지역 지구대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많은 이들이 밤만 되면 꼭 한 건씩 신고가 들어오는 젊은 주취자나 혹은 여러 연령대의 피해자를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의외로 매일같이 지방 지구대에서 마주치는 연령층이 바로 ‘노인’분들이다.


지구대에서 실습하는 한 달 동안 주간 근무 때는 어김없이 세 부류의 노인분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제2의 인생 바다로 나온 노인분들이 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낚는 어부의 심정으로 나타나신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노인분들은 ‘지구대와 상호 간 협력하기 위한 노인’분들이다 아침 8시에 출근하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듣고 있다 보면 한 시간 이내로 무더운 여름임에도 꼭 긴 팔이 있는 점퍼를 걸친 시민분들이 지구대를 방문한다. 머리가 히끗하신 그분들은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누덕누덕 해진 수첩을 건네주며 자신이 맡긴 총포를 찾으러 오신다. 사냥꾼이신 노인분들은 무뚝뚝한 얼굴로 경찰관의 출고 사인과 전산망에 입력되기를 기다리시며 꼭 지구대 밖에서만 서성이신다.

마치 사냥을 한 것이 범인을 잡는 신성한 곳에 누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어오시라고 말씀드려도 각기 다른 5명의 노인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사코 거절하시고는 도시 풍경 너머 어느 곳을 응시한다.

그리고는 늘 똑같이 마치 그곳에 약속한 사냥감이라도 기다리는 듯했다.

이분들은 자식과도 같은 총포를 들고 허가받은 사냥을 하기 위해 훌훌히 떠나고는 바람처럼 홀연히 다시 총기를 반납하기 위해 등장한다. 딱 한 번 실습이 끝나 갈 즈음 피지도 않는 담배를 피는 척 밖으로 나와 사냥감을 많이 잡으셨냐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노사냥꾼은 무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절대 입으로 해서는 안될 것처럼 그리고 그 사냥꾼들의 얼굴 주름은 잡거나 잡지 않아도 한결같이 담담하다. 그리고 단단하다.


그들의 몸에서는 늘 거친 나무 냄새가 났다.



이후 점심을 먹고 오면 두 번째 노인분들인 ‘낮의 치안을 돕는 ’노인분들이 등장한다. 오후 2시쯤이 되면 형광 조끼를 걸친 노인분들이 대오를 이루셔서 지구대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오신다. 미리 준비된 용지에 각자 사인을 하며 인사를 건네는 이 분들은 경찰청이 고용한 ‘아동지킴이’이다.

퇴직 경찰 혹은 교사로 이루어진 아동지킴이들은 주변 학교를 돌며 사회적 약자를 돕거나 위험상황으로부터 아동을 지킨다. 이들은 사건이 시시각각 항상 들어오기 때문에 9명만으로는 순찰하지 못하는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여 범죄를 예방한다. 아동지킴이들은 항상 여유롭고 웃음을 잃지 않는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이들은 한눈에 보아도 거동도 불편해 보이지만, 방범을 돌 때면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그리고 주간 근무자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아동지킴이들은 다시금 사인을 하기 위해 지구대에 들릴 때면 오늘도 안전을 지켰다는 자부심이 얼굴에 묻어난다. 이분들은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이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 여러 분들이 동시에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은 어디 초등학교를 돌았고, 어떤 꼬마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같은 노인들을 도와줬다는 등 끊임없이 그날 있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며 지구대 주변 등하굣길에 치안을 세세히 들려준다.


처음에는 끝이 안 보이는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과도 같은 길이에 기겁하였지만, 순찰차로 볼 수 없는 부분까지 샅샅이 돌아다니며 알려주는 이야기들은 보이지 않는 치안공백을 매워주는 소중한 이야기에 자세히 듣고는 하였다.




끝으로 퇴근시간이 가까워올 때면 ‘밤의 치안을 담당하는 지역 방범순찰대원 분들이 주에 한 번씩 등장하신다. 그분들은 지구대에 들려 함께 사진을 찍고는 짧게 어떤 곳을 돌아볼지 계획을 세운다. 그때 그들의 눈에는 푸른 바다가 있었다.

주간을 아동지킴이 분이 책임진다면 야간에는 지역경찰이 보지 못하는 등잔 밑을 밝혀주신다. 노인이라기에는 젊고 활기찬 방범대원분들은 직접 자진하여 밤길을 살핀다. 덕분에 기운에 퇴근시간만 오기를 바라던 나의 게으름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되면 조용히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과거에 집착하여 우울해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편견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파도와 그물과 젊음에 근육을 다진 건장한 어부들도 잡지 못한 거대한 청새치를 잡고 상어와 싸워 이겨낸 노인처럼 지역사회를 돕고 있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활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실습하는 지구대 근처에 살아 숨 쉰다는 것이 놀라웠다. 실습을 하는 한 달간 피해자로서 지구대에 오는 노인 분도 많았지만 가장 많이 목격한 모습은 지역사회란 바다에 자기의 인생을 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경찰로써 신고받은 업무만 기계적으로 행할 것이 아닌, 근무 외적으로도 지역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 더 있을지 고민할 수 있었던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 역시 그들처럼 두 눈은 언제나 청새치를 잡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어두운 곳을 항해하며 치안을 밝히는 경찰이 되고 싶다.물론 나도 뼈 밖에 없는 물고기를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둠속에서 두 눈만은 항상 바라보고 싶다.

외모는 모든 것을 세월에 내어준 겨울의 앙상한 나무 같더라도 두 눈만은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던 소설 속 노인처럼.


지역사회 곳곳을 누비며 도시를 가꿔내는 노인들처럼.

이전 07화 오늘도 나는 예언가가 되고 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