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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름 May 01. 2022

푸른 가로등이 되다

서른이, 지구대 실습일지 - 9화


 시작하는 재주는 위대하지만 마무리 짓는 재주는 더욱 위대하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라는 미국 시인이 한 명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을 읽을 때 결말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그 습관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나타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초집중해서 듣고 나름 결말을 돌출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마음에 굳어진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기승전결을 기억해낸다. 친구들은 나의 기억력을 칭찬하지만 이건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결말의 문제다. 즉, 결말이 마음에 들어서이다.     




 이 버릇은 책을 읽을 때도 드러난다. 결말이 마음에 드는 책의 이야기는 열 번이고 백번이고 책이 닳도록 읽지만, 전개가 완벽해도 결말이 엉망이면 다시는 그 책을 찾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친구들이  문제라도  풀려고   ,  여정을 품은 펄벅의 ‘대지 놓지 않았건만 지금은 다시는 찾지 는다. 기대  만큼의 결말이 아닌 탓에   많은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왕룽의 서사는 고등학교에 멈춰있다. 지금은  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반대로, 시작부터 절정까지 그토록 표현기법과 내용 9할을 혐오하면서도  년에  번은 색이 누렇게 바랜 ‘남한산성꺼내 들어 읽는다. 그리고 결말까지 읽고 나면  가슴한켠 뭉클함을 남긴다. 분홍빛 표지는 물론  책상 책꽂이 제일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그러기에  삶의 한 시기를 기록할 때에도 결말은 항상 신경 써왔다. 그것은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첫 여행기부터 미지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학창 시절까지 내 경험을 담는 이야기의 중대한 철칙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언제나 뜻깊어야 했고 마지막 문장을 글로 적을 때면 가슴이 벅차다 못해 터질 것처럼 환희를 느껴야 만족스러웠다.


따라서 십 수년을 꿈꾼 끝에 처음으로 제복을 입고 나선 경찰로써의 첫 실습의 결말은 여태 적어온 어떤 결말보다 뛰어날 것이라 믿었다.     





마지막 날. 나의 근무는 야간근무였다.

 10번을 조금 넘게 나오는 실습생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직원분들은 한결같이 좋은 말을 해주었고, 이제 막 친해질 수 있었기에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원하더라도 내가 지구대를 나갈 수 있는 날 그날이 끝이었다. 나는 매우 아쉬웠지만 부정적 마음은 집에 남겨두기로 하고 마지막을 기록할 실습 수첩을 든 채 평소처럼 지구대를 향하였다.    

 

아마 그동안의 나의 수필처럼 이 실습의 결말은 특별한 날이 될 것이란 설렘에 마지막임에도 아쉬움을 쉽게 집에 두고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경찰의 스토리는 평범함과 달랐다. 하루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급박한 지구대에 끝맺음이란 몽상에 불가하다고 말하듯 오히려 이날 한 달 중에서 가장 많은 사건을 마주했다.     


야간 근무를 시작된  여러 서류 작업을 마친 직원분들은 9 즈음 나를 위해  함께 사진을 찍기로 하였다. 라나 정확히 9시가 되었을 때부터 급박함을 알리는 상황음이 울리더니 그때 나간 우리는 지구대로  번도 돌아오지 못한  새벽 1시까지 연속으로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사건들은 도로 위에서 방황하는 치매노인 분을 무사히 집까지 모셔드리는 뜻깊은 일부터, 다수의 주차된 차를 부시고 도망친 음주운전 범을 추적해 잡아낸 강력범죄 사건까지 다양했다. 다행히 그 많은 사건 중 다친 시민 없이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이 뜻깊었다.

동시에 이처럼 경찰이라는 직업으로서 중재하거나 해결할  있는 일이 많은 지구대에서  이상 일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아쉬움이 컸다.      



 이러한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직원분들은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사건서류잡업을 하느라 잠시도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실습생이기에 덩그러니 커피만 홀짝거리는 모습이 방해가 되지 않을까 괜스레 밖으로 나가 서성이기도 했다.


남은 시간이 많기에 지구대 밖 밴치에 앉아 마지막으로  말들을 핸드폰에 적어보기도 다. 그러나 이후 거짓말처럼 새벽 2시부터 다시 신고가 리더니, 아침 8 현장 한복판에서 마지막 근무는 끝나버렸다.    

      

이후 지구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퇴근시간이 한참이나 넘은 상태였다. 혹시 기다리다 지쳐 먼저 가지는 않았을까 초조했지만, 고맙게도 직원분들은 근무복도 벗지 않은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이미   미용실까지 다녀온 나의 머리는  흔적도 없었고 주름을   다린 근무복은 후줄근해진  구겨졌있었다. 구래도 비록 겉모습은 초라했지만 누구보다 지치고 힘들었을 팀원분들이  함께 환송해주자 사진에 찍힌 나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빛이 나는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분간의 짧은 포토타임을 끝으로 팀원분들은 초심 그대로 간직하길 기원하며 손을 흔들고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 간의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나의 첫 실습은 무더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나의 소감도 고마움도 앞으로의 포부도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건만 그토록 고대하던 첫 실습은 바람처럼 스쳐서 지나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야기는 항상 기승전결이 확실하다고 배웠건만 나의 지구대 실습은  ‘결’을 맺지 못하고 끝난 것 같아 굉장히 허전했다. 다시 돌아가 흥분된 마음으로 그 문을 열고 지구대에 마지막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충동도 생겼다.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지구대 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대는 매 순간순간이 실제이자 긴급상황이다. 애초에 지구대라는 곳은 결론이 없이 계속 진행 중이기만 하는 곳이다. 사건은 언제 어느 때고 급작스럽게 다가오고 경찰이란 직업은 매 순간을 결말 없는 이야기 속에서 해결책을 만들어가야 한다.      


처음으로 마주한 결말 없는 이야기에 아쉽긴 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다른 그 어떤 이야기보다 분명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대학에서 교육을 마치고 9개월이 지나서야 임용이 되었지만 정식 경찰이 된 지금도 한 달 간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이제 나는 실습생이 아닌 진짜 경찰로서 현장에 나왔다. 실습생 때와는 달리 나의 말에 누군가는 법적인 책임을 지게 될 수 있고, 나의 행동에 시민들은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거나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이 때론 마주하기 싫기도 하고 경찰로서의 행동을 간단하게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9개월이 지난 지금도 실습 지구대의 팀원분들이 당부한 초심만은 잃지 않으려 한다. 처음 지구대를 들어섰을 때 어떻게 말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모습에, 도움이 필요한 이가 편히 나를 찾을 수 있도록 푸른 가로등이 되겠다는 그 초심을 말이다.     


앞으로 30년의 남은 경찰생활 동안 내가 어떤 경찰이 될지 궁금하면서도 두렵다. 시민들에 도움을 주는 따뜻한 해결사가 될지 아니면 영화에서처럼 주어진 일에만 철저한 냉정한 인간이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때마다 결말이 없기에 특별한 이 이야기를 펼치며 ‘대지’처럼 한번 읽고 버려지지 않고 ‘남한산성’처럼 일 년에 한 번씩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으면 한다.      



부디 선택에 갈림길에 서는 그때마다 이 이야기를 펼쳐 지구대의 푸른 형광판을 찾아 시민들이 찾아오듯, 스스로가 푸른 가로등이 되겠다는 다짐을 지키도록 말이다.         



끝으로 한 달 전 임용식 당시 시민들 향한 임용선서를 적으며 결말 없는 한 달 간의 이야기를 마치겠다.     


인권경찰 다짐     

하나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인권 경찰이 되겠습니다.

하나 우리는 양심에 따라 법을 집행하는 공정한 경찰이 되겠습니다.

하나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따뜻한 경찰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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