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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련작가 Nov 03. 2024

당신의 추악함을 사랑하라

깨달은 이를 멀리하라. 깨친 이를 가까이 둬선 안 된다. 지독하게 재미가 없는 사람일 테니. 심지어 큰 해악을 끼친다. 붓다나 예수 같은 이가 예배당이나 사찰 목조상이 아닌 바로 당신 옆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상상해보라. 벽창호인 데다 끊임없이 당신의 부족함만 비출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투명한 거울이다. 그저 언제나 눈앞의 존재를 비출 뿐이다. 그 해상도 높은 전신거울 앞에서 벌거벗은 채 깨달은 이와의 격차를 지켜보는 건 힘겹다. 그럴 때 재빨리 벗어나야 한다. 꼬리부터 머리까지 잡아먹히기 전에.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인류를 지독하게 사로잡는 고상한 편견이 있다. 그에 비하면 최신 유행인 자본주의 따위는 상갓집 개 수준이다. 그 편견이란 더 높은 차원에의 헌신, 깨달음에 대한 헌신, 신에 대한 헌신이다. 그리해서 한 차원 높은 경지를 이루려는.


누군가는 하늘을 위해 소·말·돼지·사람의 멱을 따 희생양을 바쳤고, 깨달음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 태웠다. 누군가는 신의 이름으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고, 배를 곯아가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면벽수행을 하고, 맨발로 거친 사막을 건넜다. 누군가는 언덕 저편의 세계로 가기 위해 노부모와 배우자, 자식을 저버렸다. 봉양해야 할 무방비 상태의 피붙이들을.


이러한 모두가 깨닫고 신의 품에 안긴 건 아니나, 역사가 기록한 모든 깨달은 이들은 이처럼 잔혹한 값을 치렀다. 아름다운가? 인간적인가? 아, 그거 참, 나도 저렇게 깨닫고 싶거나 신의 뜻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시대착오적 나르시시스트다. 역사가 과장한 성자들의 에고를 닮고 싶다니, 그만한 정신병이 또 없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말라. 명상도 하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말고, 요가도 하지 말라. 방하착(放下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언제까지 내려놓을 건가?


인간으로 태어나 마음을 가진 이상 낙장불입이다. 텅 빈 마음이란 있을 수 없다. 마음을 버릴 수도, 애초에 마음 같은 건 없었던 거라며 자위할 수도 없다. 감각기관과 끊임없이 뒤채는 욕망을 비우기 위해선 눈과 귀와 코와 피부와 오장육부를 모두 도려내야 한다. 그러니까, 죽은 상태가 돼야 비로소 선가에서 말하는 방하착(放下着)이 가능하다. 선가에서 말하는 명상의 최고 경지는 거대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깊은 명상의 순간에 일어나는 도파민 증가에 의한 착각. 명상중독증이다. 그런 건 술이나 약에 취하면 더 빨리 얻을 수 있다.


전국시대 장주가 말한 道는 그런 게 아니다. 21세기를 사는 장주가 말하는 道 역시 다를 게 없다. 당신의 추악함을 사랑하라. 그게 道다. 당신의 비열함, 피곤함, 두려움, 비참함, 애쓰는 마음, 때론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하기도 하고 그를 배신하기도 하는 그 모든 모습, 인간으로 태어나 느낄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 앞에 솔직하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당신의 그 인간적인 추악함에서 온다.


그리고 당신만의 아름다운 추악함을 사람을 포함한 타 개체와 비교하지 말라. 당신은 세상에 단 하나의 유기체니까. 편의에 따라 식물이니 동물이니 포유류니 유인원이니 나눴을 뿐, 모두 진화의 도상에 선 서로 다른 독자적인 유기체다. 키가 크고 작다고, 발목이 굵고 얇다고, 어깨가 좁고 넓다고 비교할 이유가 없다. 기린의 목과 당신 목을 비교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가. 타인과의 비교 역시 박장대소할 일이다.


자신만의 추악함 앞에 솔직해지면,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직시하고 품으면, 문뜩, 道의 도상에 있는 아름다운 자신을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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