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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련작가 Nov 10. 2024

조삼모사 후일담

전국시대 제물론(齊物論)에 남긴 조삼모사 일화의 후일담을 특기하고자 한다. 세상에 남기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였으나, 오늘날 선남자선여인들이 경계로 삼을 수 있을까 하여.



옛날 송나라 저공(狙公)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이제부터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말했다. 이를 듣고 원숭이들이 화를 내자 저공은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기뻐했다.



저공은 원숭이들의 요구를 받아줘도 손해를 보는 것이 없었고, 원숭이들도 자신의 요구를 관철했으니, 둘 다 잃지 않고 얻는 것만 있는 자연의 조화를 이뤘다.


성인에게 세상사의 기준이란 하늘의 저울에 따를 뿐이다. 그러니까, 상황과 때에 따라 기준을 상대적인 척도에 따라 조절하는 묘안이 필요하다. 위 이야기는 이러한 양행(兩行)의 내용이다. 사실과 명분에 있어 달라진 게 없으나, 일희일비하는 세인과 세상사에서 성인이 시비를 잠재우는 실천적인 방법론을 보여주고자 했다.


여기까지가 기록된 얘기다. 조삼모사 일화는 저공의 직을 빌렸으나, 사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다. 한때 밥벌이가 급했던 나는 원숭이를 조련해 서커스를 선보이는 저공으로 일했다. 수지타산 맞는 장사였으나, 이후에 일어난 사건 이후 나는 일을 그만뒀다. 모든 야사(野史)는 야심한 밤에 기록된다. 조삼모사 후일담도 그렇다.



원숭이들과 한판 했던 그날 밤. 문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침소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았다. 검은 형체가 얇은 창호지를 두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성거렸다. 두려움에 이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한참을 유심히 살피자 숭숭 뚫린 창호지 사이를 비집고 나온 붉은 눈알 하나와 마주쳤다. 그 섬뜩한 눈길에 이불을 부여잡은 손과 등의 땀구멍이 열렸다. 그렇게 한참 이어진 묘한 긴장감은 익숙한 목소리에 풀어졌다.


“형님, 계시오?”


분명 원숭이 왕의 목소리였다. 이 야심한 밤에 이놈이 나를 찾은 것이다. 괘씸한 놈이 도토리 따위의 문제로 감히 주인을 겁박하려 들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어나 벌컥 문을 열고 소리쳤다.


“뭐냐 이놈아!”


후회했다. 그놈이 두 발로 똑바로 버티고 선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무릎을 완전히 펴고 직립보행 자세로 선 놈의 키는 8척이 넘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가슴 근육 밑으로 보이는 다리 사이엔 시커먼 생식기가 야밤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덜렁거렸다. 입에선 지독한 술냄새를 풍겼는데, 그렇지 않아도 붉었던 눈과 뺨과 엉덩이가 취기에 더 발그스레했다.


더 큰 문제는 그놈이 양손을 허리 뒤로 감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8척 장신의 원숭이의 왕이. 얼마 전 원숭이 철창에서 잃어버렸던 칼 한 자루가 떠올랐다.


“형님, 계셨소?”


내가 겁을 집어먹은 걸 눈치챈 놈이 나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뜬 게 새삼스레 떠올랐다. 당신이었으면 당장 이놈 생식기라도 쥐어뜯었을 텐데. 대범치 못한 남편은 이렇게 당신을 따라가는구려. 양생이 다 무슨 소용이오. 야생의 폭력 앞에선 무력한 것을.


이런 생각을 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놈이 숨겼던 양손을 내 앞으로 빠르게 뻗었다.


“앉으시오.”


내게 뻗은 놈의 한 손엔 술병이, 다른 손엔 술잔 두 개가 포개져 있었다.


“형님께 술 한잔 모시러 왔소.”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보고 원숭이의 왕이 억지로 술잔을 쥐여주며 술을 따랐다. 죽기를 각오하고 물었다.


“어찌 이리 잔나비사투리 없이 사람 말을 잘하느냐? 술은 어디서 났느냐? 어찌 허리를 곧추세우고 걷느냐? 이건 설사 인간의 모습이 아니더냐?”


그러자 원숭이의 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 취향으로 말하자면 참치의 뱃살로 식전 입맛을 돋우고 상어 지느러미와 해삼, 전복, 영약을 한 데 넣은 보양식으로 주식을 먹소. 거위의 간과 철갑상어의 알을 버무려 입가심하고. 식후에는 아가베 선인장을 증류한 술에 소금을 곁들여 마시지. 이게 그 술이오. 흰소리하지 말고, 일단 한 잔 들이켜 보오.”


마지못해 놈이 준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충격이었다. 코끝의 후각과 혀끝의 미각, 식도로 넘어가는 식감까지. 삼합의 미감이 몰려오는 술맛. 가히 옥황상제의 식탁에 올라도 될 만한 술이었다. 놈이 그런 내 표정을 보고 빙그레 웃더니 내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긴장 푸시오. 내가 오늘 형님을 찾은 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요. 오늘처럼 도토리 문제나 서커스 문제, 철창 이주 문제를 계속 말씀해주시오. 형님은 원숭이들을 공중제비돌기 횟수에 따라 차별하지 않소?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열 번에 따라 다르게 철창을 배정하지. 제비돌기를 많이 할수록 더 크고 깨끗한 철창에 넣어주고. 나는 여기에 더해서 앞으로 형님이 제돌기 횟수에 따라 도토리도 차등지급하면 좋겠소.”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마른침을 삼키며 묻자 놈이 박장대소했다. 박수를 한참치던 놈의 손바닥이 더 붉어졌다.


“순진한 인사여, 잘 들어보오. 나는 도토리를 먹지 않소. 그런 쓰레기 같은 건 이미 잊은 지 오래라오. 하지만 보통의 원숭이들은 다르지. 그놈들은 그게 주식이니까. 다른 먹을 건 모르오.

서커스도 마찬가지요. 나는 그 우스운 짓거리를 더 이상 하지 않소. 사람들 앞에서 제비돌기를 몇 번을 하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오?

중요한 건 형님이 세운 기준이오. 한 번 하는 무리와 두 번 하는 무리와 열 번 하는 무리 사이에 형님이 세운 점수. 그게 아무리 우스운 거라도 우리 서커스의 세계에서는 그 점수가 진리가 되니까.

돌기를 열 번 하는 철창 출신의 원숭이는 우리 서커스단의 동량지재가 되는 것이고, 한 번만 하는 철창 출신의 원숭이는 서커스의 사회에 나가 밥벌이도 못 하는 놈이 되는 것이지. 나는 그놈들이 내가 즐기는 진정한 진미를 계속 몰랐으면 하오. 그래야 내가 그 순진한 놈들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왕 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까.”


“너는 어찌 이를 깨닫고 왕의 자리에 올랐느냐?”


내 물음에 원숭이의 왕이 마침내 꼬리로 휘어 감아 등 뒤에 숨겨뒀던 칼을 꺼내 들었다. 잃어버렸던 그 칼이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을 쥐어 든 놈의 표정이 자못 비장했다.


“당신에게 배웠지! 당신이 세운 그 어리석고도 한심한 철옹성 같은 기준에서 말야. 내가 어디 출신인 줄 아나? 제돌기 열 번을 해서 배정받은 철창 출신이야. 제돌기 아홉 번 철창에서 열 번 철창으로 옮기기 위해서 나는 수년간 피나는 노력을 했어.

열 번 철창으로 옮겼던 한때, 나는 우리 서커스단의 동량지재로 앞으로 우리 원숭이 무리를 바른 곳으로 이끌고자 했다. 하지만 당신은 끝까지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쳤어. 야생의 원숭이들을 잡아 와 네 멋대로의 기준으로 철창에 가둬놓고 네놈 배만 채우는 방법으로.

이제 나는 다른 원숭이들을 짓밟고 무시하고 그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며 그들을 지배하지. 그러면 그 바보 같은 원숭이 놈들 스스로 기준을 세워서 우리 서커스 조직의 위계를 만들어. 아홉 번 도는 놈들은 나를 보면 바닥에 누워 배와 생식기를 까 보이며 굴종하면서 나머지 놈들을 짓밟고, 여덟 번 도는 놈들은 나와 아홉 번 도는 놈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발바닥을 핥으며 충성하면서 나머지를 짓밟지.

나는 이래도 돼. 왜냐하면 나는 공중돌기를 열 번 했던 철창 출신의 원숭이니까! 나는 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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