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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련작가 Nov 22. 2024

무아를 버리고 자아를 취하라

바야흐로 행복의 시간이 왔다. 오늘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는 게 가능해서다. 하지만 정작 우리 하루하루는 힘겹고 고되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가 다른 점은 물질과 정신의 균형이다.


먹고 살기 급급했던 과거엔 가짜 자아가 강했다. 빙하기와 기근, 전염병, 천재지변이 일상이었던 선사시대. 흑사병과 봉건제 신분제도가 작동했던 중세. 천연두와 대기근에 시달렸던 18세기 이전. 1, 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찾아왔던 20세기 중반까지. 그 시기는 모두 살아남으려는 투쟁만이 있었다.


그래서 생존 자체가 목표였던 시기를 벗어나, 이른바 ‘일상생활’이 가능해진 20세기 후반에 접어들기까지 인류는 무아(無我)를 정신활동의 과녁으로 삼았다. 생존을 위해 강해진 가짜 자아를 추악하다고 간주해서다. 비참한 현실을 벗어난 언덕 저 너머를 동경하면서.


무아는 다양한 방법으로 피어났다. 대표적인 활동이 종교와 철학이다. 애니미즘과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자이나교, 유교, 도교 등. 표현은 다르나, 실상은 모두 가짜 자아를 버리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다. 돌덩이에, 나무에, 태양에, 달에, 하나님에, 하늘에, 인의예지에, 출가 사문에, 도(道)에, 불법(佛法)에. 각자의 사정에 따라 이들을 믿거나, 자신을 바치고 귀의하고 기도하면서 지금의 나와 오늘의 나를 잊으려고 애썼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후반 이후 반전을 맞는다. 종교와 철학 같은 정신활동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고 무신앙과 무종교를 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구시대에 작별을 고한 이들도 진정한 자유를 맞은 건 아니다. 종교와 철학이 진화했을 뿐인 까닭이다. 하나님과 깨달음의 지위를 돈이 대체하고 그 교리를 자본주의가 대체했다.


먹고 살기 힘든 과거에 무작정 정신을 추구했다면, 먹고 살 만한 오늘날엔 무작정 물질을 추구한다. 둘 다 종교이자 철학이다. 그리고 하루하루 생활의 엄격한 기준이다. 현대인들은 돈을 믿는다. 자본주의라는 교리를 하루하루 충실히 따른다. 부동산과 주식 열풍이다.


불평등과 기간산업의 위기는 이제 돈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돈이 수단이 아닌 숭배의 대상이 되면서다. 베트남 전쟁에서 닉슨의 불태환 선언 이후 종잇조각처럼 찍어낸 달러는 전 세계 인플레이션의 상수가 됐고, 이제는 뭐가 진짜 화폐인지 그 정의조차 내리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는데, 이민자 정책과 산업에 대한 조망보다 코인 시장이 어떻게 될 것인가가 호사가들의 얘깃거리가 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이런 세계적 흐름의 예봉이다. 광신도의 마녀사냥은 오늘날 한국에서 임대아파트 거주민 혐오로 재현된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오늘날 한국에서 강북과 강남, 강남에서도 강남3구, 강남3구에서도 강남·서초, 강남과 서초에서도 강남 제일주의로 재현된다. 서울 아닌 지방은 불가촉천민 취급이고.


전 세계 1위의 자살률과 전 세계 꼴찌의 출산율을 기록하면서도 대한민국의 돈에 대한 믿음은 끝을 모른다. 저장강박증의 일종이나, 치료법이 없다. 처절한 암기식 교육과 학벌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10대가 가스라이팅 당하고, 20·30은 대기업과 고시, 전문직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스라이팅 당해서다. 그렇게 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백신을 맞을 시기도, 치료받을 시기도 모두 놓친 채 중년을 맞아 하루하루 전전긍긍 자리보전 눈치싸움에 열을 올린다.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오를 사다리는 없다. 지구촌 한 구석 조그만 반도에서의 방석 뺏기 놀이일 따름이다.


전국시대 장주나 지금의 장주나 말하는 건 같다. 자연스럽게 자기로 살라는 말이다. 자아를 가지라는 말이다. 스스로 독자적인 유기체임을 잊으면 안 된다. 스스로를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 어느 사회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말라. 사회적 활동은 유기체로 생존하기 위한 밥벌이의 일환일 따름이다. 오직 자신으로 서고, 자신으로 살라. 누군가에 의해, 사회에 의해 주어진 조건으로 이뤄진 가짜 자아가 아닌 진짜 자아를 가져라. 진심으로 신을 믿지도 말고, 무아를 위해 명상하지도 말고, 돈을 믿지도 말라. 신과 무아와 돈은 사회적 수단일 뿐이다. 오직 자신을 믿어라. 


오늘날 내가 신을 얼마나 믿어야 하는가? 성당이나 교회에 나가 기도할 때만 믿으면 된다. 오늘날 내가 명상을 어느 정도 해야 하는가? 사찰에 들어가 삼배할 때만 하면 된다. 오늘날 내가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만 있으면 된다. 종교와 돈 모두 믿음의 영역으로, 사회생활의 일환일 따름이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라. 자아를 찾은 당신에게 위없는 행복이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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